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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10년 전 마이클 샌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가 쓴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서 지금까지 20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하버드대 1학년 교재이자 딱딱하고 어려운 정치철학 서적이 슈퍼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은 한국이 유일하다. 미국에서는 얼마 팔리지 않은 책이 한국에서 인기를 끈 것을 보고 샌델 교수도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이런 인기 때문에 샌델 교수는 자주 한국을 찾았고 서울시 명예시민이 되기도 했다.

제러미 벤담으로부터 이마누엘 칸트, 존 롤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쟁쟁한 학자들의 정의 개념을 다루는 이 책은 상대적으로 평이할 뿐, 재미있지는 않다. 실제로 끝까지 읽은 독자도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많이 팔린 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며, 정의에 대한 갈망이 크다는 방증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에서부터 불의에는 직접 행동에 나섰던 시민의식도 한몫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시위를 발판으로 2017년 5월 취임하면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3년 뒤 제1회 청년의 날인 지난 19일 문 대통령은 방탄소년단(BTS)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청와대에서 열린 행사에서 37번이나 공정을 반복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는 ‘공정’에 대한 청년들의 높은 요구를 절감하고 있으며 반드시 부응하겠다”고 했다. 특히 “청년의 눈높이에서 공정이 새롭게 구축되려면 채용, 교육, 병역, 사회, 문화 전반에서 공정이 체감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강조한 공정과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공정의 개념이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국 전 장관의 자녀 교육 특혜, 인국공(인천국제공항) 사태,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황제 병역’ 사태가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데 수십 번, 수천 번 공정만 되풀이 말한다고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달나라 공정’이 아니라면 사과부터 하는 것이 순서다. 여당은 불공정에 분노해 공익 제보한 ‘당직 사병’ 청년을 범죄자라고 모략하는 판에 대통령이 공정을 얘기하는 것은 기만이다. 군사쿠데타의 주역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 목표로 내세웠던 것과 많이 닮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책이 많이 팔렸다고 정의로운 사회가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공정을 수백 번 얘기한들 무슨 감동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