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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자(1937∼1975)

지난해 가을,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처음으로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났다. 어머니는 입을 다문 채 지그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단 한 마디의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에 다급하게 말을 건넸다. “어디 아픈 데는 없으세요?” 하고 안부를 묻는 순간, 동녘이 밝아오며 어머니는 별을 따라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목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얼굴을 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됐다. 아쉬운 마음에 이튿날 어머니를 뵈러 갔다. 북받치는 감정을 쓸어내리며 산소의 잡초를 뽑던 중, 어릴 적 어머니의 일상이 아련히 떠올랐다. 젖 냄새 풀풀 나는 돌쟁이를 등에 업고 빠듯한 살림을 일으키려고 몸부림치던 모습이 그려졌다.

어머니는 명절이 다가오거나 용돈이 궁해질 때면, 광 한편에 간수해 오던 곡물을 팔아 제수를 장만하기도 하고, 우리 옷이나 신발도 사 오곤 했다. 때론 아버지 몰래 눈깔사탕을 장망태기 깊숙이 숨겨와 우리 입에 넣어 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비바람이나 눈보라가 몰아치는 짓궂은 날씨가 아니면, 버스비라도 아끼려고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길을 한 시간 남짓 걸어 다녔다. 매사 절약이 몸에 배어 있던 아버지도 성치 않은 몸으로 걸어서 오일장을 드나드는 어머니를 만류했지만, 그 뜻이 확고해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검정 고무신 한 켤레씩을 사주겠다고 약속하고, 오일장으로 향했다. 기대를 한가슴에 안고 갔던 터라 실망도 컸다. 불과 닷새 전과는 달리 녹두값이 떨어진 게 아닌가. 당황한 어머니는 잠시 등짐을 내려놓고 고심을 거듭하다 녹두를 팔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는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어느새 저 언덕 너머로 우리 집이 어머니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새 고무신을 기다리는 어린 자식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아른거렸으리라. 어머니는 차마 빈손으로 갈 수 없어 결국 시장으로 되돌아갔다.

녹두값이 내려 고무신을 사줄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고등어 한 손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우리를 위해 정성스레 반찬을 만들어주며 서운한 마음을 쓰다듬었다. 잠시 뒤 어머니는 슬며시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자 나는 궁금한 생각에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그때 어디선가 아스라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우리에게 행여나 들킬까 봐 외양간 한구석에서 눈물짓고 있었다. 철부지인 나는 그 눈물의 의미도 모른 채 눈만 말똥거렸다.

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던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을 몇 개월 앞뒀을 때, 지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막냇동생은 첫돌을 갓 넘긴 무렵이었다. 갑작스러운 아픔을 겪게 되면서 어머니의 빈자리는 우리가 채워 가야만 했다.

어느덧 어머니와 이별한 지 4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어머니의 품이 그립다. 어느 날 문득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들어설 것만 같다. 봄 햇살처럼 포근했던 어머니의 사랑이 마음속 깊이 배어들며 그리움은 더해만 간다. 지난해 가을, 어머니를 모신 곳을 찾아갔다.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정성스레 올려드리며 꿈속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했다. 갈바람 타고 남실거리는 억샛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머니의 안식을 기원했다.

아들 강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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