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첫 장편 SF ‘빛의 전쟁’을 펴낸 이종필 건국대 조교수는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공유의 정신에 있다”며 “한국 사회는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이런 태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사진 왼쪽 수식은 이 교수 본인의 노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이번 소설의 표지에도 쓰였다. 사진=김동훈 기자·그래픽=김연아 기자

■ 첫 장편 ‘빛의 전쟁’낸 이종필 건국대 조교수
“양자역학은 이미 21세기 敎養… SF 넘어 현실도 바꾸게 될 것”

“책속에 등장하는 가설과 이론은
대부분 이미 논문으로 나왔던 것

매일 업데이트 되는 최신의 논문
어지간한 SF보다 훨씬 SF 같아

물리학 개념 차용 ‘과거 투시’로
역사 속의 논란 시점 들여다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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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물리학자’로 유명한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조교수가 첫 장편 소설 ‘빛의 전쟁’(비채)을 펴냈다. 그동안 과학 교양서를 쓰고, 정통 물리학책을 번역하던 이 교수는 최근 정치·시사평론까지 전방위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소설에 도전. 본인의 주특기(입자물리학)를 살린 과학소설(SF)이라고 하니, 평소 그의 ‘글맛’을 안다면, 여러모로 기대감이 상승될 수밖에. 양자역학, 인공지능(AI), 드론, 자동기계학습시스템 등 최신 연구와 이론, 트렌드를 반영한 작품은 ‘과거 투시’라는 가상의 기술을 핵심 소재로 등장시킨다.

“이런 기술이 있다면, 우린 무얼 하고 싶을까.” 첨단 과학으로 역사적 사실을 다시 조망하는 책은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무엇부터 해야만 할까.” 이 질문은 ‘지금, 왜 SF인가’라는 다소 거창한 물음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지난 8일 서울 중구 문화일보 본사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그가 반드시 해야만 했던 그 ‘무엇’은 무엇인가. (※소설 ‘빛의 전쟁’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존재함)

―물리학자의 SF. 조금 놀랍기도 하고, 매우 자연스럽기도 하다. 써보니, 어땠나.

“‘시골에 집 짓고 싶다’ 같은 막연한 꿈처럼, 과학자들에겐 ‘언젠가 SF를 쓰겠다’는 로망이 있다. 실제로 책이나 강연 등 ‘과학 대중화’ 작업을 하는 학자들은 SF 작가나 영화 관계자들과 교류가 많은 편이고…. 과학을 소재로 재미있는 얘기를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어려웠다. 평소 자문하는 SF 작가들에게 이러쿵저러쿵했는데, 직접 쓰는 입장이 되고 보니 창작자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더 깊어졌다. 평가받을 입장이 되니 두렵기도 하다.”

―양자컴퓨터, 양자인공지능연구소, 알파폴리스 등 소설 속 개념과 기술들이 실제로 얼마나 이뤄졌는지 궁금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가설과 이론 등은 대부분 이미 논문으로 나온 것들이다. 실험실 레벨에서는 모두 이뤄졌다는 의미다. 현실에서도 양자 알고리즘이 도입되는 단계로 알고 있다. 21세기다. 20세기 실험실에서 논의되던 것들이, 이제 현실을 바꾸러 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때, 21세기 교양인이라면 그 출발점이 될 양자역학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한다.”

―이번 소설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상’의 기술은 바로 ‘과거 투시’다. 가능한 일인가.

“과거를 카메라로 찍듯이 본다는 건 현실적으로 아직 불가능하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138억 년 된 빛을 모아서, 빅뱅 직후에 만들어진 빛과 입자들에 대해 연구하고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린 이미 ‘과거를 보고 있다’. 이 개념을 차용해 소설에 적용한 것인데, 연구방법과 소설 속 이론은 사실 많이 다르다. 그런데 이 질문은 좀 스포일러성이 강한 것 아닌가, 하하.”

―‘과거 투시’ 기술이 들여다본 과거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역사적 사실을 끌어들인 이유가 있나.

“아직 한국은 과학에선 변방국가다. 우리가 엄청나게 발달한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면, 역시 우리가 청산·극복해야 할 민족적 어젠다부터 해결하려 하지 않을까. 여전히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과거의 어떤 시점을 투시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그 기술이 제대로 빛을 발할 테니까. 명성황후 시해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6·25전쟁, 가깝게는 세월호와 5·18 민주화운동 등이 있을 수 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인물, 물리학자 ‘성환’에 본인이 투영됐을 듯싶다. “성질 완전 싸가지. 혼자 잘난 인간”이라고 묘사했는데.

“물리학 하는 사람들이 좀 까칠한 편이다. 자부심, 자만심 가득하고, 솔직히 인격파탄자들도 좀 있다. 나 나름대로는 학생운동도 했고, 학부도 오래 다니면서 물리학계의 폐쇄적인 문화를 답습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박사 졸업 무렵이 되니 누가 그러더라. 처음 봤을 때 싸이코 인 줄 알았다고….”

―“과학과 비밀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대목이 눈길을 끌었다. 과학자로서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과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건 공개하고, 공유하는 정신에 있다.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건 여기까지다’라고 하면, 그다음 사람이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그 성과 위에서 출발할 수 있다. 그게 다 같이 더 잘 사는 길이다. 뉴턴이 ‘거인의 어깨에 올라섰다’고 한 말뜻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누가 가로챌까 봐 연구노트를 금고에 넣어두는 ‘비밀주의’는 과학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그런 게 부족하다. 혼자 잘해야 하고, 남들보다 1점이라도 높아야 하고…. 이래서는 오래 못 간다. 20세기엔 김연아, 이세돌 같은 슈퍼 영웅 몇 명이 세상을 바꿨는지 모르지만, 21세기는 다르다. 집단지성이 폭발할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이건 과학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

―평소 SF를 읽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나.

“솔직히 SF보다 과학 논문 읽는 걸 훨씬 더 좋아한다. 그게 일이기도 하지만, 매일 업데이트 되는 최신 논문이 어지간한 SF보다 훨씬 더 SF 같다. 사실 책도 논문도 읽을 시간이 별로 없다. 학기 중엔 ‘월급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에 치이고, 연구할 시간도 부족하다. 로망이던 SF는 하나 냈지만, 아직 내 이름 붙은 과학이론 하나 없는…, 그렇게 ‘삼류 물리학자’로 살고 있다…. 하하.”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