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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호열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정부의 5·24 조치와 관련 ‘남북 합의 시 북한 선박의 한국 해역 통과 가능’이란 정부의 설명에 대해 미국 국무부가 “모든 유엔 회원국은 안보리 결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통일부 대변인은 지난주 정례 브리핑에서 시행 10년째인 5·24 조치가 역대 정부를 거치면서 유연화와 예외 조치를 거쳐 사실상 그 실효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고 밝힌 바 있다. 통일부 장관의 즉각적인 부인에도 불구하고 제21대 국회에서 거대 집권 여당이 출범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 현 정부가 집권 후반기 남북경협을 가속화하려는 사전 포석으로 간주할 수 있는 대목이다.

5·24 조치는 북한의 천안함 폭침에 대한 우리의 대응조치이자 북한의 추가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억제책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10년간 수차례 예외 조치가 있었다고 해서 5·24 조치가 실효성을 상실했다는 통일부 대변인 발표는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천안함 폭침 이후 5·24 조치가 대북 제재로서 유효했기 때문에 유연화나 예외 조치도 가능했던 것이고, 그럴 필요와 그런 상황에 따른 반대급부가 그나마 확보될 수 있었던 것이다.한반도에서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한 5·24 조치의 실효성 여부를 통일부 식으로 유약하게 해석해선 안 된다.

현 정부 들어서 4차례나 남북 정상회담 또는 만남이 있었지만, 남북 간 근본적인 신뢰 관계가 구축됐다고 볼 수는 없다. 남북은 여전히 갈등과 긴장 관계이며, 군사적 대치 상태 역시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와 재래식 무기의 지속적인 성능 개량으로 불안정성이 더 커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5·24 조치의 일방적인 무실화 발언들은 그 의도와는 달리 매우 나쁜 시그널이 될 수 있다. 적대적 관계에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은 평화를 유린할 경우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는 믿음을 양측이 공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2010년 천안함 폭침 도발에 대한 북한의 전향적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근거 없이 실효성 상실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일방적인 폐기 수순을 밟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5·24 조치는 천안함 폭침에 따른 우리의 대북 응징 차원의 제재이나 유엔의 포괄적인 대북 제재와도 연계돼 있다. 북한의 비핵화 없이 5·24 조치의 일방적 폐기를 통한 본격적인 남북 간 교류 협력 추진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런 우회로를 탐색하는 것이 행여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일 취임 3주년 연설에서 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말자고 한 주장을 구체화하려는 것이라면, 코로나19 이후 전개될지도 모를 신냉전의 첫 번째 희생양을 자초할 수도 있다. 우리의 안보와 경제가 튼튼해야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고 남북관계도 주도할 수 있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남북관계를 주도할 의욕만 앞선다면 한반도의 평화는커녕 우리 자체의 안전과 번영을 순식간에 상실할 수도 있다.

북한 김정은 정권이 과거에 비해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은 있다. 지도자에 대한 무모한 우상화 대신 강력한 힘의 정치를 추구하고 주민의 삶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다. 그러한 북한에 대해 과거처럼 일방적인 퍼주기나 이념적 편향성을 갖고 접근하는 것은 오히려 냉철한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을 방해할 수도 있다. 북한의 무모한 도발과 억지 주장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리고 그에 따른 책임과 보상을 엄격히 추궁하는 게 우리식 접근 방식이어야 한다. 5·24 조치는 그런 면에서 유효했고, 정부의 태도에 따라 그 실효성이 더욱 입증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