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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협 (1920∼1995)

그립습니다, 남재 김상협 총재님. 서울 혜화동 서재에서 깊은 사색에 잠겨 계실 때 “총재님” 하고 문을 두드리면 미소를 지으며 반겨 주시던 총재님이 영영 떠나시고 아니 계시다니 허전함과 절망감을 외쳐 부르며 눈물로 옷깃을 적십니다.

나 혼자만 그럴까. 총재님 내외분을 존경하던 모든 사람의 한결같은 고즈넉한 마음의 울림이 들려옵니다. ‘떠난 사람은 날이 갈수록 멀어진다’ ‘눈에서 떠나면 마음에서도 벗어난다’고 하지만 세월을 거스르는 헤어진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봄비가 내리니 그리움의 새싹들이 땅을 뚫고 얼굴을 내밀듯 총재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국민에게 꿈과 용기를 주신 내 인생의 큰 스승, 큰 뜻과 큰 그릇과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으니 옛말에 “대현(大賢)은 대우(大優)”라 한 것은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 국무총리, 대한적십자사 총재께 한 말인 듯 이 시대의 진정한 선각자를 잃은 슬픔이기에 이처럼 가슴이 아리다. 대학생 시절 교정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았던 총장님과의 소중한 인연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오시면서부터다. 만 4년 동안 총재님 비서관으로 일하며 참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총재님이 1995년 2월 21일 7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지 올해로 25주기를 맞았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2019년 같은 날 2월 21일 부인 혜천 김인숙 여사께서 총재님이 계시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사람들은 총재님 내외분을 천운을 타고나신 부부라고 했다. 부부가 같은 날 제사상을 받으니 말이다. 올해는 총재님 탄신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총재님 내외분 기일에 찾아뵙지 못한 죄송한 마음에 오늘따라 총재님 내외분 모습이 더욱 그리워지는 이유다. 총재님은 늘 서재에서 신문과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책에 묻혀 지내신 독서광으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쓰셨다.

총재님!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청색 잉크가 나오는 만년필로 일기를 쓰시나요? 한때 나도 총재님처럼 일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작심삼일이 됐다. 평소 사모님에 대한 사랑은 원앙처럼 느껴졌다. 비서들 앞에서 사모님을 “엄마”라고 부르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매사에 절차와 순서를 중시한 분이셨다. 혜화동 한옥에는 사람의 발길이 끊기는 날이 없었다. 온화하고 소탈한 품성을 지닌 총재께서는 진리를 탐구하는 교수로 국정운영의 중책을 맡고 적십자 인도주의 정신 구현을 위한 사랑과 봉사의 현장에서 우리 국민과 세계 적십자사 회원국에 용기와 희망과 꿈을 심어 주셨다. “막힌 곳은 뚫고 굽은 것은 펴겠다”는 국무총리 취임사를 되새기며 남북 이산가족의 애환을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셨던 기억은 잊을 수가 없다.

1985년 9월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단을 인솔해 평양을 방문한 기간 중 평소 무신론자인 총재께서 기독교, 천주교 합동 예배에 긴 시간 자리를 함께하시며 통일을 위한 기도라면 매일이라도 예배에 참석하겠다고 한 말씀은 당시 대표단과 우리 국민의 마음을 숙연케 했다. 평양에서 주무실 때 “그렇게도 와보고 싶던 평양인데 무엇이 두려우랴” 하시면서 언제나 방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총재님 내외분이 적십자사에 대한 애정을 담아 일궈 놓으신 많은 일이 유산처럼 남아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진정 국면에 이르면 한 손에 마주앙(백포도주)과 또 한 손에는 국화꽃을 한 아름 안고 대전국립현충원에 다녀와야겠다.

전원균 대한적십자사동우회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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