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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녀(1913~1984)

저의 어머니께서는 고전 문학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장화홍련전, 심청전, 흥부놀부전 등등. 그 시대에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표지는 물론 앞뒤가 몇 장씩 떨어져 나가고 없는 누렇게 탈색한 책을 비나 눈이 와서 들에 일을 못 나가는 날엔 읽고 또 읽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장롱 깊숙이 들어 있는 아버지의 옷가지를 꺼내 매만지시며 느닷없이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소리 죽여 읊조리다가 금방 눈가가 촉촉해지셨습니다. 6·25전쟁 중 38세의 젊음을 시대의 희생양으로 떠나보낸 아버지를 애타게 그리워하시며 애달픈 심정을 달래던 모습을 어린 저는 슬픈 사슴 눈처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며 그저 어른들이 흥얼거리는 푸념이려니 생각했습니다.

문학을 한답시고 장르를 마다치 않고 글을 자주 썼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어머니께 써봅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평생을 짠하게 바라보던 막내딸입니다. 무더운 긴긴 여름날 사래 긴 밭 김을 매러 가실 때 제 손을 잡고 가셨고, 엄동설한 대보름 전후 산 아래 맑은 물 찾아 용왕제 지내러 가던 밤길에도 제 손을 꼭 잡고 가셨죠. 잘 간추려진 볏짚 한 단 손에 쥐여 주시며 가는 길에 무슨 소리가 나도 절대 뒤돌아보지 말고 따라오라 하던 당부 말과 그때 어머니의 풀 먹인 당옥치마 서걱거리는 소리가 얼마나 무서웠던지요. 위로 오빠 둘 언니 둘 있는데 하필이면 저만 데리고 가실까 의아해하면서도 탓해본 적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36년. 어머니 떠나시고 3일 동안 그 37세 고아는 얼마나 울었던지요. 보다 못한 외삼촌께서 우리 누님은 30여 년은 덤으로 사신 거라고 위로하며 달래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당신의 기일을 쉽게 기억하라는 배려로 그 추운 동짓달 스무나흘 장남의 생일을 택하셨지요. 어머니가 너무 그리울 때면 산소에라도 가고 싶지만 너무 죄스럽고 가슴 아파 차마 가지 못하다 5년이 지나고 큰언니와 처음 산소에 갔습니다. 끝없이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같이 울던 언니가 “그만 울어라. 누가 보면 흉본다. 칠십 넘도록 살다 가셨고 가신지도 오래됐는데”라며 달래는 말이 더 서러워 계속 울고 있는데 갑자기 “산에 오십니까” 하고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길래 얼굴을 드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를 달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어머니 곁에서 울다가 웃다가 하다 돌아왔습니다.

어느덧 제 나이가 71세로 돌아가실 때의 어머니 연세를 넘고 보니, 왜 그렇게도 막내를 끼고 다니셨는지 이제야 뼈저리게 알겠습니다.

아버지 떠나신 충격으로 들것에 실려 대문을 나서 병원으로 가던 날 어머니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1년 후 퇴원하던 날 어머니께서 저를 안으려 하자 낯선 사람인 줄 알고 울어버린 서너 살 적 기억이 어찌 이렇게도 또렷하고 아픈지요. 저희 5남매의 무게가 어머니 일생을 얼마나 짓눌렀을까요. 그래도 눈물은커녕 슬픈 내색 한 번 없이 너무나 헌신적이고 강인하셨습니다. 다행히 저희 5남매가 속 썩이지 않고 착하게 성장해 제 앞가림 잘한다고 어머니는 늘 자랑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그런데 제가 어머니를 딱 한 번 실망시켜드렸지요. 어머니가 반대하신 결혼으로 말입니다. 어머니, 두고두고 후회하며 용서를 빕니다. 한 번의 불효를 만회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두 번 다시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으려고 단 하루도 한 시간도 허투루 살지 않고 있습니다. 어머니, 이제 우리 형제들도 어머니 곁으로 갈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후생에서 만난다면 제가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어머니, 정말 많이 보고 싶습니다.

막내딸 이석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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