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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산(1926∼1950)

종심의 나이 일흔이 넘은 나는 아버지 얼굴을 모른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본다.

‘짙은 눈썹이며 꼼꼼한 것은 어쩌면 너는 너 애비를 똑 닮았니.’ 어머니는 내 얼굴을 보며 처음 이런 말씀을 하시며 슬그머니 얼굴을 돌리신다.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어? 아버지보다 내가 더 잘 생겼어? 나는 왜! 아버지가 없어?’

그 말에는 말을 흐리며 한참 있다가 말씀하신다.

‘그래! 너는 밖에서 주워 왔단다…. 거울 앞에 서 봐라. 그 속에 웃고 있는 네 얼굴이 아버지란다. 너 애비는 참 바지런한 사람이었지. 마실 갔다가 때가 되면 잰걸음으로 와서 꽁꽁 언 손을 녹일 틈도 없이 마른 짚단을 썰어 소여물을 끓이며 갔다 온 얘기를 자상하게 들려주는 분이었단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밖을 둘러보며 헛기침할 때는 ‘천식이 있어서 밤이면 콜록콜록 기침하며 끙끙 앓은 너 애비 닮지 말아라’고 하신다. ‘너 애비와 살면서 너희들 셋 낳고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그저 좋아서 제 세상인 줄만 알았지. 안 그랬으면 멀리 꽃구경이라도 보냈을 걸,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며 고개를 몇 번씩이나 돌려 식구들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도 못하고… 얼마나 무섭고 마음 졸이며 몸서리를 쳤겠니.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단다. 구시월 들녘에는 산국화가 그렇게도 많이 피었었지. 그 꽃을 못 보고 된서리에 그냥 시들고 말았단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니.’

시아버지, 시어머니, 남편, 시동생을 잃고 목숨을 부지한 것이 죄인 양 어머니는 과부로 팔십 평생을 땅만 보며 일만 하다 말없이 많은 사연 가슴에 묻고 가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아버지는 6·25전쟁 때 민간인 희생자의 아픔을 그린 ‘문둥이 나라’라는 제목의 절명 시를 남기셨다.

‘솔따비가 죽던 날/ 동네 사람들은/ 쉬쉬하며/ 거적으로 둘둘 말아/ 솔 모루 모래톱/ 기척 없는 골망에다/ 얼른 묻었다.

그 후/ 시체가 들려 나간/ 안방 문지방엔/ 언제부터인가/ 아픈 상처로 자국 난/ 가위표 네 개가 새겨져 있었다.

주홍글씨처럼/ 운명으로 따라붙은 낙인이/ 한 가족의 떼죽음으로….’

아∼ 이 절절함을 어찌 다 읽으랴.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나 더 읽어 보고 싶지가 않다. 어릴 적 나는, 어머니는 무서운 것도 없고 어려운 것도 없고 걱정도 없고 그저 일만 하는 사람으로만 알았다. 이담에 어른이 되면 나도 어머니처럼 저렇게 되겠지 했는데, 종심의 나이가 되어서도 나는 일이 무섭고, 어렵고, 두렵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아비 없이 잘못 자란 것인지 일흔이 넘었어도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그 일을 따라갈 수가 없다.

오늘은 아버지가 유난히 생각나는 밤이다. 보고 싶어 그리울 때는 모르는 얼굴이라도 그려야 아버지를 잊지 않을 것 같다.

아들 정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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