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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익(1940~2009)

재주 많은 사람이 단명한다던데…. 그림 잘 그리시고 글씨도 잘 쓰시던 아버지는 너무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제 기억이 다소 왜곡된 것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삼 남매에게 아버지는 가장 따르고 닮고 싶은 분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저와 동생 가족은 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시절을 보낸 강원도의 작은 어촌마을을 찾았습니다. 당시 넓었던 학교 운동장은 생각보다 작았고, 아버지와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 빨간 대문집은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좁은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녔던 어린 시절, 젊은 아버지는 당신이 눈 안에 담고 싶었던 삼 남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셨습니다. 사진 속에 담긴 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걸어본 시골 장터는 옛 모습 그대로였고, 저와 동생은 어릴 때의 기억을 금세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학교 뒤의 우리 집은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가 됐지만, 당시 담 넘어 고등학생 오빠들이 학교 축사에서 돼지몰이를 하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어 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그 오빠들도 이제 오십 줄을 훌쩍 넘긴 중년이 됐겠죠.

저는 가끔 아버지와 함께했던 곳들을 가보곤 합니다. 파도가 넘실대는 주문진항, 떨어지는 빗방울을 꿀꺽 삼켜버리는 강릉 경포대, 고불고불 고갯길로 올라가면 보이는 설악산, 낭떠러지에 아슬아슬 걸쳐 가다 기차가 멈춰 서는 태백역…. 가는 길 곳곳엔 아버지와의 소중한 추억이 가득하기만 하고 해가 갈수록 더욱 짙은 아버지의 빈자리를 느끼게 합니다.

은퇴 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발길 닿는 대로 여기저기 여행 다니길 바라셨고, 저와는 지리산 등반을 하자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소원들을 모두 이루기도 전에 아버지는 갑자기 찾아온 병환으로 몸져누우셨습니다. 삼 남매 중 아버지와 여행을 가장 많이 한 저이지만 일이 바쁘다며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들을 미처 이뤄드리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연두색을 유난히 좋아하셨던 아버지, 하늘 끝 어디선가 예쁜 꽃과 나무를 가꾸고 계실 듯합니다. 나무를 하나하나 심고 기르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얼마 후 영산홍이 필 즈음이면 더더욱 기억이 날 아버지…. 계절이 수없이 바뀌었지만 기억은 또렷해지기만 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희미해질 줄 알았던 아버지와의 기억이 새록새록 더 선명해지는 건 왜일까요. 사진 속 지금의 저보다 더 젊었던 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 시절 아련한 추억들이 하루하루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딸 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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