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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1916~1999)

특전사에서 군 생활을 한 나는 한 달여간 실시된 훈련의 마지막 관문인 천리행군 중이었다. 행군의 후반부로 가면서 피로감이 쌓이고 한발 한발 떼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걷다 보니 저녁 무렵 오른쪽에 길게 뻗어 있는 지방하천의 둑길을 걷고 있었고 하천의 좌우로는 산이 쭉 뻗어 있는 익숙한 풍경과 마주하게 됐다. 그곳은 어렸을 때 썰매를 타고 쥐불놀이를 하고 스케이트를 타고 놀던 추억이 있는 충북 음성, 나의 고향 마을 앞의 하천이었다.

“이 중위님, 저기 앞에 보이는 다리에서 한 어르신이 이 중위님을 찾으십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백발이 성성하고 작은 체구에도 해를 등져 그림자가 매우 거대하게 보인 그분은 나의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나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 문병을 다녀오시는 길에 특전사의 행군을 보고 혹시 손자가 있을까 기다렸다가 군인들에게 물어보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빨리 복귀해서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가야 한다는 마음에 고통을 잊고 걸었던 것 같다. 부대로 복귀하자마자 검은 베레모를 쓰고 청주의 병원으로 다리를 조금 절뚝거리면서 아버지 문병을 갔는데 아버지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으셔서 병실에 안정을 취하며 누워계셨다. 같은 병실에 있던 어르신들이 내 모습을 보고 진찰을 받아야겠다고 웃던 기억이 난다. 돌아보면 한 편의 영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할아버지께서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가신 강인한 분이셨다. 일제강점기에는 야구선수로 활약했고, 일제에 강제징용돼 머나먼 남중국해까지 파견돼 전쟁에 참전한 후 살아오셨다. 6·25 이후 시골의 읍사무소와 면사무소 등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시고, 퇴직 후엔 논, 밭농사와 과수원 등을 하시면서 8명이나 되는 자녀들의 부양하느라 애쓰셨다. 둘째 손자였던 나에게 유독 잘 해주셨는데,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라고 그래야 키가 큰다고 하시며 끼니때마다 챙겨주셨다. 뭔가 잘못을 해도 허허 웃으며 귀여워 해주셨다. 언젠가는 내가 사과 과수원 안에 있는 원두막에서 맛있는 과일을 먹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커다란 통과 노란 줄로 연결된 소독 기구로 땀을 흘리며 소독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뛰어 내려가 “할아버지, 저도 노란 줄 잡고 소독해 보고 싶어요”라고 했더니 “이놈아, 소독약 묻어 안돼, 가서 과일이나 먹고 있어”라고 만류하시던 장면이 생각난다.

일곱 살 무렵, 고향 마을에서 할아버지와 같이 저녁을 먹는 중 밥을 아주 조금 남긴 일이 있었다. 갑자기 얼굴에 불이 번쩍하며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호통을 치셨다. “한 톨도 남김없이 먹어야지, 농부들이 힘들게 수확한 건데 그렇게 남겨? 얼른 싹싹 긁어먹어.” 깜짝 놀란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밥그릇에 붙어 있던 마지막 밥알 한 톨까지 긁어먹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밥을 먹을 때마다 남기지 않으려고 자연스럽게 노력하게 됐다.

나는 성장해서 교사가 되고 경기도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고, 할아버지께서는 고혈압으로 쓰러지신 후 몇 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 돌아가셨다.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지만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그대로 아들들에게 실천한다. “한 톨도 남김없이 먹어야지, 농부들이 힘들게 수확한 건데 그렇게 남겨? 얼른 싹싹 긁어먹어.” 아들들은 입을 삐죽 내민 채로 한 톨도 남김없이 먹으려 노력한다. ‘할아버지, 하늘에서 편히 계세요, 저는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실천하고 있습니다.’

손자 이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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