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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건(1923∼1975)

가지마다 곱게 차려입고 앙버티던 잎새들을 하나둘씩 떨구고 나면, 휑하니 가벼워진 나무들이 화르르 떠나간 계절을 겨우내 그리워하듯 나의 가슴속 깊은 곳에 오도카니 자리 잡고 떠나지 않는 이름 하나가 있다. 어찌 보면 전혀 애틋하지도 그립지도 않아, 애초 내 생애에는 없었던 듯, 스쳐 지나간 꿈이었던 듯한 그 이름 ‘아버지’.

이제는 떠나신 지 너무 오래돼 어떻게 생기셨는지, 목소리는 어떠셨는지 가물가물하기만 한 아버지를 애써 떠올려보면 제일 먼저 서울 갈현동 양옥주택 현관 앞에, 두꺼운 유리와 타일로 막아 팔뚝만 한 물고기 몇 마리 헤엄치던 커다란 수족관과 마당 한가운데 구덩이를 내어 물을 담고 손수 만든 무지개다리를 걸쳐 놓았던 작은 연못, 하늘색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바로 양옆으로 펼쳐지던 꽃밭이 함께 어우러져 떠오른다.

아버지가 손수 가꾼 그 꽃밭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철 따라 종류를 달리해 온갖 꽃이 피고 졌다. 맨드라미, 분꽃, 채송화, 달리아, 해바라기, 코스모스 그리고 지금은 여염집 화단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붉고 농염한 양귀비까지. 그리고 또 과묵한 아버지가 눈으로만 따라다니시던 꽃 세 송이, 우리 세 자매가 있었다.

늦게 결혼해 나와 두 살 터울 내 여동생을 낳고 9년 후 느지막이 낳은 자식이 또 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고 막내딸을 엄청 이뻐하셔서 널따란 마루 걸레질을 할 때도 걸레에 막내를 태우고선 죽죽 밀고 다니셨다.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를 많이 하던 내가 몸살이 나서 누워 있으면 슬그머니 홍옥 한 알을 가져다가 머리맡에 두고 나가시면서도 ‘빨리 나아라’든가 ‘많이 아프냐?’든가 묻는 법이 없으셨던 그런 무뚝뚝한 아버지가 나는 싫었다. 더군다나 갈현동 집을 팔고 한창 개발 중이던 봉천동으로 이사와 작은 이층집을 짓고 남은 돈으로 투자한 땅을 고스란히 사기당한 후부터 골골대며 시름시름 앓아누운 아버지의 모습은 더더욱 싫었다.

그 후 수년이 지나고 아버지는 끝내 그 배신감을 이기지 못하고 암 투병을 하다가 3개월 만에 세상을 등지셨다. 세상 떠나시던 날 아침, 학교를 가려던 나를 쳐다보시며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는데 나는 도망치듯 현관을 나서고 말았다. 그것이 마지막인 줄 누가 알았을까.

아버지가 떠나신 지 올해로 44년, 웬일인지 어려운 일이나 슬픈 일이 생기면 문득문득 아버지가 떠오른다. 무덤도 없이 훌훌 떠나신 그분이지만 내 가슴속에서는 아직도 작은 둥지 하나 틀고 계셨나 보다. 아버지가 만드셨던 예쁜 꽃밭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지만, 서울 난초(京蘭), 귀한 난초(貴蘭), 비단 난초(錦蘭) 세 송이 꽃은 살아남아 아버지보다 더 긴 세월을 살고 있다.

이제는 너무 늦었지만 젊어 돌아가신 청년 같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못다 한 말을 되뇌어본다.

아버지, 사랑해요…. 그립습니다, 아버지.

큰딸 경란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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