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보다 큰 꽃, 나는 물고기… 화폭 가득 ‘朝鮮의 초현실주의’

이미지 크게보기 주전자가 공중에 떠 있고, 책 위에 죽은 채 놓여 있는 어린 물고기를 화병 속 그림으로부터 튀어나온 큰 물고기가 불쌍한 듯 바라보고 있다. 책거리도 8폭 부분, 조선시대. 조선민화박물관 제공

서울 예술의전당 ‘민화의 비상’展
조선시대 20여점 등 초현실 작품 전시

핑크빛 둥근 달… 비상하는 거북이…
비례·원근 상식 깨고 파격적 기법 선봬

학과 물고기가 함께 하늘을 날고, 핑크빛 둥근 달 아래로는 쪽배를 따라 새우와 거북이 비상하고 있다. 또 산봉우리보다 더 큰 꽃송이 위에서 나비들이 희롱하며, 공중 부양 중인 주전자에, 화병에서는 물고기가 튀어나온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이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우리 민화에 등장하는 풍경들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민화 그리고 초현실주의(Surrealism)’라는 부제 아래 열리고 있는 ‘민화의 비상(飛上)’전은 민화계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시도가 녹아 있는 기획전으로 주목받고 있다.

전시에서는 ‘제1장, 민화 그리고 초현실주의’라는 소주제에 맞춰 강원 영월의 조선민화박물관 소장품 5000여 점 중 초현실주의가 관찰되는 전통민화 20여 점과 이 전시를 위해 특별히 그려진 초현실주의가 극대화된 현대민화 32점을 함께 선보이고 있다.

비례와 원근감을 무시하는 파격 구성이 특징인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일어난 예술사조로 프로이트(1856∼1939)의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하는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다룬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오토마티즘(automatism)으로 손이 가는 대로 무의식의 세계를 그리는 동시에,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에 의해 일상의 물건을 전혀 다른 곳에 배치해 꿈의 세계를 표현했다.

그런데 눈여겨보면 전통민화에도 내재된 관점은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초현실주의가 관찰되는 작품이 많다. 특히 많은 작품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꿈의 세계를 포착해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표현기법들은 실제로 초현실주의와 맞아떨어진다. 물론 전통민화 대부분이 기복적이거나 벽사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만큼 초현실주의의 정신분석학적 무의식 탐구와는 차이를 보인다. 부부의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원앙새를 나무나 집보다 더 크게 그린 것도 기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럼에도 민화에서의 시각적인 초현실주의적 특징은 작품의 제작 시기를 뛰어넘어 현대적인 미감을 드러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시를 기획한 오석환 관장은 “이번 전시는 민화 인구(20만 명 추산)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음에도 실제로 가정집에 걸린 작품은 별로 만나볼 수 없는 것처럼 대중 회화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며 “초현실주의란 테마로 민화의 현대성을 고찰하고, 다양한 현대적 방법론으로 녹여내는 실험을 통해 궁극적으로 현대민화의 판로 개척과 대중화, 더 나아가 세계화를 위한 전시”라고 설명했다.

전시장 한쪽 코너에는 현대민화 작가 32인이 이번 전시를 위해 ‘초현실주의’란 테마로 특별 제작한 32점의 작품도 걸려 있다. 조선민화박물관 공모전 입상자들로 구성된 32인의 작가는 3년 전 전시 기획 시점부터 초현실주의의 역사, 의의, 대표 작가, 사용되는 다양한 방법론 등에 대해 서로 소통하고 이를 현대민화에 녹여냈다.

현대 창작민화 작품들은 빛바랜 듯한 조선시대 민화보다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고 화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래픽디자인 기법에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어린 왕자, 축음기와 고층 빌딩 등을 접목해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그려졌다.

엄재권 한국민화협회 명예회장은 “민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전통민화의 활발한 계승과 현대적인 발전을 동시에 모색하는 이번 전시의 실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며 “풍자와 해학, 감동이 어우러진 민화의 범주가 이번 전시를 통해 ‘심미성’이라는 영역으로까지 범주를 확장할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전시는 9일까지.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산봉우리보다 더 큰 꽃송이 위에서 나비들이 희롱하고 있다. 화조소상팔경도 부분, 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