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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77세로 세상을 뜬 마서 무어 밸러드라는 미국 여성은 뉴잉글랜드 할로웰에서 27년간 아이를 받아낸 산파였습니다. 산파 생활의 일상을 꼬박꼬박 일기에 적었다는 것 이외에 그녀의 삶은 평범했습니다. 그녀가 떠난 지 179년이 지난 1991년 그 일기는 최고의 역사 저작물에 주는 뱅크로프트상과 퓰리처상(역사부문) 수상작이 됐고, 미국의학사학회상, 뉴잉글랜드 역사학회상 등 8개의 상을 받습니다. 국내에선 ‘산파일기’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됐습니다. 당시 미국사 연구자인 로럴 대처 울리히 뉴햄프셔대 교수는 일기에서 기존 역사 서술이 담아내지 못한 하층 계급과 여성의 삶, 당시 출산 의료 환경 등 생생한 모습을 줄줄이 발견해 책으로 출간했던 겁니다.

거창한 ‘위인’과 공식 기록, 사건 중심의 거시사(巨視史)는 당대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 개인의 삶의 리얼리티와 정서를 사상시켜 버립니다. 20세기 후반 미시사(微視史)가 개인의 기록을 건져 올려 역사의 일반적 해석을 보완하는 방법론으로 등장한 건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근래 우리 사회에서 자서전이나 회고록 쓰기가 제법 유행하고 그것을 교육하는 모임들도 여럿 생겨나고 있는 건 바람직해 보입니다.

지난해 말 출간된 ‘다람쥐캉 하늘수박’은 경주 출신으로 농촌에서 자라며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4·19와 5·16의 격랑을 굽이쳐 돌았고, 한화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해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길을 닦은 ‘산업화 세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인 김주석 씨의 회고록입니다. 이번 주 ‘북리뷰’ 톱기사로 다뤄진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 세대’는 386세대의 ‘장기독점’을 분석하면서 그 이전 ‘산업화 세대’의 정체성을 ‘도시에 정주하는 농민’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김 씨는 그 ‘전형’을 보여줍니다. 사실 산업화 세대는 이후 세대에 비해 무시되거나 부정적 뉘앙스마저 씌워져서인지 기억에 남는 개인사 기록이 없습니다.

회고록은 아주 소소한 개인사이면서 자연스럽게 역사 일반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다소 놀랍습니다. “쌀밥 먹는 게 소원이던 시절에 돼지 먹이로 줄 음식찌꺼기를 손수레로 실어 나르기”도 했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가치관의 전도가 심각했던” 세대의 흔치 않은 개인사입니다. 회고록에 나오는 집안 어른이나 친척, 주변 인물들에 관한 회고와 대하는 자세 등은 핵가족과 일인 가족이 대세인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 어른 대에서 끝난 게 아닌가 하는 아득함도 남습니다.

이번 주 출간된 ‘잃었지만 잊지 않은 것들’(라이킷)은 다른 관점에서 의미 있는 개인적 기록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김선영 씨가 쓴 이 책은 암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지만, 자신 또한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던 경험과의 사이, 즉 경계에서 바라보고 성찰한 기록입니다. 송두리째 삶을 뒤흔들고 두려워 언급조차 금기로 여기는 암,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거나 남은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껴온 저자는 자신의 그같은 경험을 잔잔하게 담아냅니다. 대형 병원의 냉혹한 시스템도 언급하고, 항암 치료, 대체 요법, 연명의료법, 완화적 진정 등 의료계의 이슈들을 짚어가며 죽음에 대비하는 다양한 방법을 살펴봅니다. 죽음에 대한 담론이면서 슬프지만은 않은 죽음에 관한 에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