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진작가로 인생 2막을 열고 있는 정수정 씨가 13일 서울 종로구 돈의동 도심권50플러스센터 야외 화단에서 카메라를 붙잡은 채 피사체를 가리키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정 씨는 “매번 사진을 찍다 직접 모델이 되니 어색하다”면서 “찍히는 사람의 심정을 오늘에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낙중 기자 sanjoong@

‘영월 통신사’로 인생2막 연 정수정 씨

20년간 영어강사 활동하다
도시생활 지쳐 가평에 정착

군인 자녀 영어 가르치다가
우연히 사진강좌 알고 수강
사진 찍은 지 1년만에 입상

얼음결정 등 추상 매력느껴
美 교수도 예술감각 칭찬해

최근 유튜브 제작 뛰어들어
주특기 영어로 여행지 소개
두달만에 콘텐츠 5개 만들어
“언젠간 나만의 사진전 열 것”

‘여행에서 남는 건 사진’이라는 말이 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돌아온 일상에서도 여행 중 찍은 사진을 들춰보며 잠시나마 반복되는 삶을 잊고 추억에 잠긴다. 여행 사진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다른 누군가의 발길을 여행지로 재촉하는 힘이 있기 때문. SNS에 공유된 ‘여행 인증샷’을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떠나고 싶은 욕구가 샘솟곤 한다.

정수정(64) 씨는 ‘여행 소환자’로 불린다. 그가 찍은 풍경 사진에 마음이 동해 여행지를 찾는 이들만 수백 명에 달해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돈의동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 만난 정 씨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직업으로 인생 전반전을 마쳤지만, 가끔 자의가 아닌 타의로 나를 찾는 사람들이 있을 때면 괴로웠다”면서 “지금은 억지나 강요 없이 진짜 관심 있는 사람들만 내 사진을 보고 여행 계획을 세우는데, 이 때문에 인생 후반전 직업으로 사진 찍는 일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정 씨는 한때 이름을 날린 영어회화학원 원장이었다. 그것도 교육열이 서울 강남구에 버금가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천당 위에 분당’이라고 불리는 부촌 지역에서 2000년부터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 씨의 학원은 서울까지 입소문이 퍼질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다. 학생들의 등·하원을 돕기 위한 버스가 매일 수십 대씩 동원될 정도.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12시간을 꼬박 일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정 씨는 2003년 6월 돌연 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정 씨는 그로부터 7년여가 흐른 2010년 처음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도시 생활에 지쳐 2006년 경기 가평군에 정착한 정 씨는 소일거리로 인근 군부대에서 복무 중인 군인들의 자녀를 몇몇 모아 영어를 가르쳤다. 오전엔 도서관, 오후엔 수업. 그렇게 또 4년이 흐르다 보니 교외의 아름다운 풍경도 일상이 됐다고 한다. 정 씨는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 갔는데 우연히 ‘사진 강좌’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며 “1년 만에 작가로 만들어주겠다던 문구에 속아 사진을 배우게 됐다”고 말했다. 정 씨는 “강좌가 아쉽게 한 달 만에 폐강됐다”며 “난생처음 디지털 기기를 만지며 생소했지만, 아이처럼 호기심이 일었던 느낌을 잊지 못해 계속 사진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정 씨가 전문 작가로 데뷔한 건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천명을 훌쩍 넘어 비로소 ‘취미’라는 게 생겼고, 300여 만 원의 거금을 들여 전문가용인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도 구매했다.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투자한 첫 소비였다고 한다. 정 씨는 온라인 사진 동호회에 가입해 다른 사람이 올린 사진에 감상평을 달았다. 카메라 기능을 익히기 위해 씨름했고, 실전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출사도 수백 차례나 다녔다. 그리고 독학 8개월 차인 2010년 10월 사진 대회에서 입상하며 마침내 한국사진작가협회로부터 작가 공인을 받았다. 정 씨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물 흐르는 대로만 살아왔던 것 같았는데, 작가가 된 이후 다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며 “이순이 다 돼서 성취감을 느낀 것만으로도 삶에 활력이 생겼다”고 강조했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수정 씨의 추상 사진 작품 ‘스타카토’. 자동차 보닛 위 빗방울을 확대해 촬영했다. 정수정 씨 제공

정 씨는 이미 사진 마니아층에선 꽤 알려진 유명 인사다. 전 세계 사진 전문가들이 애용하는 온라인 사진 커뮤니티 ‘500px’에 등록된 회원 중 정 씨를 팔로한 사람만 2700여 명에 달한다. 정 씨의 전문 분야는 추상화다. 단순한 정물이 아닌 얼음 결정을 찍어 의미를 부여하는 식의 촬영을 즐긴다. 정 씨는 “500px는 매일 좋은 사진 순위를 매기는데 이미 여러 차례 1등도 해봤다”면서 “미국 뉴욕의 한 아트스쿨 교수가 예술적 감각을 칭찬하기도 했다”며 자랑했다. 정 씨는 “개인전은 아니었지만, 서울메트로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도 출품했다”며 “언젠가는 나만의 사진이 걸린 작품전을 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정 씨는 국민연금관리공단이 개설한 강좌를 접한 뒤 여행 사진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는 지난해 여름부터 신중년 세대의 은퇴 이후 노후 준비를 위해 로컬여행 디자이너 양성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로컬여행 디자이너는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인구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자신만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이다. 공단은 강원 영월군과 업무협약을 체결, 1기 수료생인 정 씨를 지난 4월 ‘영월 통신사’로 임명했다. 정 씨는 자신의 특기인 사진으로 영월군을 홍보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정 씨는 여행 디자이너로 ‘인생 2막’을 열어젖힐 꿈을 갖고 있다. 그래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무대를 목표로 설정했다. 정 씨는 최근 유튜브 영상 제작에 뛰어들었다. 자신의 특기인 사진과 영어를 모두 녹였다. 한국의 명소를 찍은 사진에 영어 해설을 곁들이는 식이다.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 그러나 정 씨는 도심권50플러스센터에서 열리는 영상 제작 강좌를 찾을 정도로 열정적이다. 정 씨는 “집이 도봉구에 있는데, 강좌를 꼭 들어야겠다는 마음에 종로구까지 오게 됐다”며 “아직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서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난 4월 25일 첫 영상을 게재한 뒤 벌써 5개의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조회 수는 평균 200여 건으로 낮은 편. 구독료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영상 제작을 위해선 사재를 털어야 한다. 너도나도 유튜브 스타를 꿈꾸는 상황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만류하는 주변인도 여럿 있었다. 그래도 정 씨는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언젠가는 ‘한국 여행 전도사’ ‘민간 외교관’이 되는 날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다고 강조하며 활짝 웃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배운 지 아직 10년도 채 안 됐지만, 이미 많은 것을 일궜다고 생각합니다. 20여 년간 강단에 섰지만, 은퇴 이후 인생에서 다시 영어를 쓸 일이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젊은 시절 내 역량과 자산을 활용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노력하면 수입으로도 연결되겠지요. 일흔이 돼도, 여든이 돼도, 아흔이 되더라도 해볼 수 있는 데까진 해볼 생각입니다. 외국인들이 내가 꼽은 인생샷 명소에서 여행 사진을 찍게 될 거라 확신합니다. 100세 인생이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결국, 남는 건 사진이니까요.”

김성훈 기자 powerkimsh@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