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는 항공모함. 미국은 인구와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으로 슈퍼파워가 가능하지만, 일본은 자원부족국이어서 오히려 출산율 저하에 따른 인구감소를 ‘선택적 변화’로 삼아야 한다고 저자는 조언한다. 김영사 제공

- 대변동:위기,선택,변화 /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총균쇠’의 재레드 다이아몬드
대변동 맞은 현대 국가의 위기
12가지 핵심 요인으로 압축해
美·日·獨 등 7개국 사례 분석

한때 서울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꼽힌 재레드 다이아몬드(82)의 ‘총, 균, 쇠’(1997)는 ‘왜 민족들 사이에, 왜 대륙마다 문명의 발달에 차이가 났을까’를 다루었다. 각 민족의 생물학적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고 주장한 저자는 역사에 대한 인종주의적 허구를 벗겨냈다는 찬사를 받았지만, 인간의 역할을 축소하는 ‘지리적 결정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최신작 ‘대변동’은 세계를 움직이는 석학으로 불리는 저자를 이런 비판에서 벗어나게 해줄지 모르겠다. 이번 책은 대변동을 맞은 위기의 현대 국가들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주체로서 인간과 국가의 의지 문제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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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르면, 영어에서 ‘위기’를 뜻하는 ‘crisis’는 ‘구분하다’ ‘결정하다’ ‘전환점’ 등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위기를 예측하고, 선택하고, 또 다른 도약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걸 암시한다. 전조 없이 닥치는 위기는 없다. 국가의 위기는 오랫동안 축적된 외부적 압력이나 내부적 압력에서 온다. 성공적으로 대응하려면 ‘선택적 변화’(selective change)가 필요하다. 압력에 짓눌려 과거 방식으로 회귀하거나 더 나쁜 선택을 한다면 도퇴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선택적 변화’인데, 사실 개인이나 국가는 과거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없고 그런 변화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중에 재대로 작동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을 가려내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 즉, 압력을 받으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정직하게’ 평가해야 하는데, 바로 개인이나 국가의 그러한 성찰능력이 관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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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현실론 또는 합리성이 드러나는 이 같은 안목은 12가지 ‘국가적 위기의 결과와 관련한 요인’으로 압축된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핀란드, 일본, 칠레,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7개국이 각기 다른 환경에서 변화를 요구하는 압력에 부딪혔으나 선택적 변화를 통해 국가 위기를 극복하거나 실패한 사례들을 비교, 분석한다. 예컨대 1939년 인구의 40배가 넘는 접경국 소련으로부터 침공을 받은 핀란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한 소련의 신뢰를 얻기 위한 외교정책을 펼쳤다.이 선택을 통해 모든 동맹국으로부터 버림받고 ‘겨울 전쟁’에서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현실을 인정하며, 즉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위기에 대해 ‘정직한 자기 평가’로, 지금은 부러움을 받는 나라가 됐다.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펴온 일본도 1853년 미국 함대의 압력에 처해 광범위한 변화를 선택하면서 고유의 특징을 간직하며 부유한 산업국가로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으로 이끈 선택도 있었지만.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밀접한 일본과 미국이 당면한 위기 분석, 인류가 맞고 있거나 곧 닥칠 위기에 대한 진단은 우리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적지 않은 힌트도 준다. 저자는 현대 일본의 위기로 급감하는 출산율과 고령화 등 인구감소 문제를 꼽는다. 한국은 일본보다 출산율이 더 낮다는 점도 지적한다. 뜻밖에 저자는 인구감소가 일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호주, 핀란드, 스웨덴 등등 인구는 훨씬 적지만 세계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국가가 많다. 특히 일본은 자원 빈곤국으로, 인구감소가 골칫거리가 아니라 커다란 이점이라는 것이다. 다만 일본이 군사강국을 꿈꾸고, 한국과 중국에 대해 과거사를 전혀 사과하지 않고 있는 행보는 인구감소를 전환점으로 삼는 데 있어 ‘나쁜 선택’ 중 하나란 점을 강조한다.

미국의 위기는 정치적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민주주의가 와해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경제적 불평등과 인종차별에서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비롯됐듯이 절망감이 심화되면 중대한 격변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저자는 건강보험과 공공교통, 교육, 고령연금자, 예술활동 등 삶의 다양한 면을 정부가 지원하는 유럽 국가들에서 미국이 배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류의 미래 위기와 관련해 원자력 발전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전망은 우리도 눈길이 간다. 저자는 “원자력의 위험은 무엇이고, 대체에너지의 위험은 무엇인지, 다시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1945년 이후 인명 피해로 이어진 핵 발전소 사고는 체르노빌 사고 등 두 건으로 32명이 사망했으며 그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엄청날 것으로 보지만, 화석원료의 연소에서 비롯되는 공기오염으로 매년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범지구적 기후 변화에 의한 엄청난 피해라는 ‘확실성’과 비교해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원자력을 ‘선택적 변화’로 꼽는 것이다. ‘생리학’에서 출발한 자연과학자로서 저자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600쪽, 2만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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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문판과 한국어판이 동시에 출간됐다. 벌써 미국과 유럽의 유력 신문들에서 서평이 쏟아지고 있다. 세계적인 저자의 책에 대한 동시 출판은 국내에서도 몇 차례 있었지만, 영어권 이외에 한국어로만 동시 번역되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김영사는 교정 중인 단계의 영어판부터 원고를 받아 번역에 들어갔고, 최종 수정된 원고는 나중에 받아 번역을 완성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