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존엄성’ 인식한 삶은 흔들리지 않아

이미지 크게보기 저자는 자기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존엄을 지켜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플루엔셜 제공

- 존엄하게 산다는 것 / 게랄트 휘터 지음, 박여명 옮김 / 인플루엔셜

인간을 도구화하는 경쟁 사회
신념 무너뜨리는 외부 충격에
뇌의 작용인 존엄성으로 대처
학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발현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 조명
기존 천부인권 등과 다른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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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무너지는 사태는 먼 곳에서만 벌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직장 내 갑질 문제 고발과 피해자 지원을 하는 시민단체 ‘직장갑질 119’에는 직장 내 괴롭힘 사례 제보가 수천 건이나 쏟아졌다. 실수할 때마다 손가락을 자르겠다는 협박부터 직속 상사의 상습 성추행까지 괴롭힘 유형도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다채롭다.

최근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의미 없는 치료를 받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는 존엄사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이 존엄하지 않은데 죽음이 어떻게 존엄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책은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 존엄을 삶의 양식으로 제안하고 이를 지키는 방법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독일 출신 세계적인 뇌과학자인 저자는 신경생물학적 관점에서 존엄은 인간의 본능이자 삶 속에서 되살려야 하는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존엄을 천부인권이나 철학적 주제로 바라보는 기존 접근과 다른 차원의 접근이다.

저자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적인 질서를 세우고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 이 같은 구조 때문에 인간의 뇌는 잠을 자거나 쉴 때도 가용 가능한 에너지의 20%를 소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갈등 상황에 마주치거나 무언가를 새롭게 배우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비량이 증가해 뇌가 고통을 받는다는 게 저자의 논리다. 저자는 애정과 소속감, 주체성과 자유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무너뜨리는 환경에 처했을 때, 우리 두뇌를 정밀 기계로 촬영해보면 몸이 고통을 느낄 때와 같은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뇌의 혼란을 잠재우려면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는 내면의 나침반이 필요하고, 뇌 속에 뿌리 깊이 형성된 감각인 존엄이 그 역할을 한다고 밝힌다.

저자는 거대한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기업·사회·개인이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택한 모든 것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로 우리에게 되돌아와 뇌에 혼란을 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구 온난화와 대기오염 등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재앙, 이익 극대화란 미명 아래 인공지능(AI)과 자동화 로봇으로 대체되고 있는 노동의 현실, 온라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광고와 과잉 정보들 속에서 비대해진 개인의 탐욕 등은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하는 인간을 평가의 대상과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존엄이란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신념 체계라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타인과의 경험을 통해 서로 학습하고 구조화되는 ‘사회적 기관’이다. 특별한 지시나 훈련이 없어도 같은 모양으로 거미줄을 만드는 거미,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청어, 잠복하고 있다가 먹잇감이 다가오면 덥석 물어버리는 악어와 같이 동물은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태어날 때부터 특정한 행동 형태를 보인다. 폐쇄적인 구조를 가진 동물의 뇌와 달리, 인간의 뇌는 개방적 구조를 가지고 있어 평생에 걸쳐 학습하기 때문에 주변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저자는 이러한 뇌의 작동방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엄성을 인식하게 된 인간은 결코 현혹되지 않는다”는 핵심 명제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보호와 소속감, 창의력과 자율성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은 뇌에 강하게 뿌리내린 존엄이란 신념을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저자는 가족, 교육기관, 직장 등 다양한 공동체가 존엄을 끊임없이 인식하도록 돕는 과정을 선행한다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와 발전도 가능하다는 논리를 끌어낸다.

“자기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은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에서 성공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광고 전문가들이 들이미는 그 어떤 대리 만족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미 자기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을 자신의 의도와 기대, 목적과 전략의 수단으로, 더 나아가 유혹과 허황한 약속의 수단으로 이용할 마음도, 그를 통해 이득을 얻는 일도 없다. 이미 자신의 존엄을 인식하고 있기에 타인의 존엄을 해치지도 않는다. 이것은 곧 자신의 존엄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162~163페이지)

저자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전문 용어 대신 일상의 언어로 설명하며 독자에게 친절하게 다가간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도 선택의 문턱을 낮추는 요소다. 일상에서 다양한 경로로 모멸감을 느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면, 이 책은 주말의 좋은 동반자가 될 것이다. 232쪽, 1만4800원.

정진영 기자 news119@munhwa.com

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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