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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의 봄

삶은 무거운 것인가 아니면 깃털처럼 가벼워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밀란 쿤데라의 역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각색해 만든 영화 ‘프라하의 봄’(1988년·사진)의 연출자인 필립 카우프먼은 쿤데라가 던진 삶의 딜레마를 세 남녀의 운명을 통해 그린다. 이 영화의 원제는 소설과 같다.

배경은 혁명의 열기가 전 세계를 향해 퍼져나갔던 1968년의 체코 프라하. 젊고 유망한 외과의사 토마스(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섹스중독에 가까운 폴리가미적 성생활을 즐기며 산다. 토마스의 수많은 파트너 중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연인인 사비나(레나 올린) 역시 토마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다. 토마스는 출장차 내려간 한 시골마을에서 웨이트리스인 테레사(쥘리에트 비노슈)와 마주치게 된다. 테레사는 도회적이면서도 선량한 인상을 가진 토마스에게 한눈에 반한다. 토마스도 테레사가 마음에 들지만 별 기약 없이 도시로 돌아온다.

사비나와 격렬한 한낮의 정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날, 토마스는 느닷없는 초인종 소리에 밖을 확인하는데 복도에는 상기된 얼굴의 테레사가 눈을 깜박이며 엉거주춤 서 있다. 놀란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일을 구하러 왔다며 둘러대지만, 요동치는 그의 눈동자는 토마스를 향한 열병을 숨기지 못한다. 토마스는 오랜 기다림 탓에 기침을 토하는 테레사를 안으로 들이고, 그를 돌본다. 맥박과 호흡을 체크하는 토마스의 손길에 테레사는 더 이상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눕힌다. 토마스를 끌어안은 테레사는 지긋지긋한 시골의 때가 벗겨지는 것 같은 환희를 느낀다. 행여 토마스의 마음이 변할까 테레사는 그의 허리를 알몸으로 감고 놓지 않는다. 그렇게 둘은 이후로도 줄곧 한 몸으로 지내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을 찾아온 토마스에게 화가 난 사비나는 그에게 여자가 생겼음을 직감하지만 그와의 ‘에로틱한 우정’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한편 사비나의 체취를 잔뜩 머금고 집으로 돌아온 토마스에게 테레사는 분노하고 그의 집을 떠난다. 그러나 거리는 ‘프라하의 봄’을 저지하는 소련군이 점령했고, 테레사는 카메라를 꺼내 탄압의 현장을 찍기 시작한다.

테레사를 찾으러 나갔던 토마스 역시 저항 군중에 합류한다. 그렇게 이들의 소소한 삶은 풍전등화 속 체코의 운명에, 암울했던 세계사의 한 귀퉁이에 저당잡히게 된다. 소련군에 의해 사진을 모두 빼앗긴 테레사는 토마스와 함께 스위스로 망명한다. 새로 정착한 제네바에서 이들은 먼저 이주했던 사비나와 재회한다. 불안해진 테레사의 예상처럼 토마스는 사비나와의 섹스밀회를 재개한다. 절망한 테레사는 아마도 자신의 비극을 더 큰 비극으로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절규와 암울의 한복판인 프라하로 돌아간다. 테레사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한 토마스 역시 그를 뒤따르고 이들은 예전의 안위를 되찾지 못한 채 방황하다가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미국으로 이주한 사비나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체코에서 날아온 그 편지에는 토마스와 테레사가 교외에 있는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비보가 담겨 있다.

이미지 크게보기 김효정 영화평론가

원작자인 쿤데라는 실존주의를 표방했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 토마스는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라는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 한 번뿐인 인생에서 중요한 것도 없고 지켜야 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의 말초를 자극하는 섹스만이 실존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테레사는 운명을 믿고, 운명의 신음에 복종한다. 이들의 열렬한 사랑은 서로의 상이한 믿음을 어떻게든 합치시켜줄 것 같았지만 정반대로 영화는 이들의 죽음으로써 존재의 무(無)가치를 역설하며 끝을 맺는다. 체코에서 반공산당 활동으로 저서를 압수당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던 쿤데라의 정치적 트라우마 안에서 탄생된 이 사랑 이야기는 섹스를 삶의 징후로, 죽음을 삶을 초월하는 영속(永續)의 가치로 매김하는 한 혁명가의 독백이기도 하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