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그림=김의규 화백

구자명·김의규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23)기항(寄港)의 섬

이십 년 전의 첫 만남부터 공항에 마중 나올 때까지 그는 여전히 술과 함께였다 날 반긴건지 술을 반긴건지 새벽부터 달려나온 녀석 영락없는 아일랜드인 모습 제주만 섬인가, 여기도 섬 어차피 지구는 우주의 섬 더블린의 삶을 보고가면 어디서든 살 수 있을 거라네

더블린 공항에 도착하자 철은 휴대폰부터 켰다. 헤이, 나 지하 1층 바에서 모닝 비어 한잔하고 있을게. 패트릭의 문자가 벌써 들어와 있었다. 공항에 마중까지 안 나와도 되는데 굳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누라 잔소리를 피해 아침부터 한잔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 철의 코끝에서도 구수한 기네스 향이 아른거렸다.

어휴, 하필 그 짜증 나는 드골공항에서 갈아탔단 말이지. 파리 시내엔 좀 들어가 봤나? 노트르담 머리가 날아가다니…! 아깝긴 하지만 부자들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지. 벌써 1조 이상 모였다며? 빅토르 위고가 거길 배경으로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그 성당은 벌써 옛날에 폐사지가 되었을 거야. 더구나 요즘 세상에 누가 신 따윌 신경 쓰겠나, 그 잘난 프랑스인들이 말야….

패트릭은 여전했다. 상대방이 듣든 말든 웅얼웅얼 제 생각을 맥락 없이 주워섬기는 버릇이나, 끈이 늘 반쯤 풀려 있는 커다란 농구화를 신은 발로 용케도 넘어지지 않고 타조같이 겅중겅중 나아가는 걸음새나, 엷은 금발이 눈 위를 덮을 정도로 긴 앞머리 사이로 이따금 푸른 눈이 사파이어처럼 날카로운 빛을 발해 그가 마냥 어수룩한 술꾼이 아님을 문득 깨닫게 하는 것 등등이 이십 년 전 이스탄불 뒷골목에서 처음 만났을 때나 변함없었다. 철이 혼자 앉은 노천 주점 테이블 위에서 거의 바닥 난 터키산 보드카 병을 보고 패트릭이 다가와 말했었다. 이렇게 마셔대다니, 당신은 틀림없이 한국인일 테지. 다음 병은 내가 따면 어떻겠소? 그들이 세상의 많은 배낭족처럼 ‘방황하는 젊은 영혼’이었을 적에 그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철에게 건넨 첫마디였다.

그의 증조부가 19세기 말에 대서양을 건너온 이래 선대 2대와 마찬가지로 뉴욕의 아이리시 타운에서 나고 자란 패트릭은 대학 때부터 혼자 캘리포니아로 옮겨가 살았다. 그런데 여러 형제 중에서 유독 패트릭이 아일랜드인의 기질을 물려받았다며 그의 독일계 어머니가 한탄하곤 했다 한다. 아마도 그녀의 한탄은 막내아들이 아일랜드의 애주가들이 흔히 그렇듯이 비관과 낙관을 자유로이 오가는 인격으로 성장한 걸 간파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는 자주 마셨고, 많이 마셨고, 오래 마셨는데 한 번도 배낭족 시절의 다른 친구들처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균형을 잃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패트릭은 철이 젊은 시절 세상 각지를 떠돌며 만난 수많은 외국인 중 어떤 형태로든 인연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갖게 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십 년 전쯤부터 조상의 나라로 역이민을 가서 살았다. 느슨한 인상과 달리 분석적 소양을 타고난 그는 유능한 수학자였다. 금세기 들어 금융업과 IT업으로 국력을 부쩍 키운 아일랜드는 동구권, 인도 등지에서 수학에 능한 기술이민자들을 많이 받아들였다. 뉴델리의 한 대학에서 힌두 철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그곳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학생-교수의 생활을 즐겼음에도 인도의 술문화를 마땅찮아 했던 그가 아일랜드의 부름에 응한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철이 바라나시에 있을 때 이따금 찾아와 몇 날 며칠 거룻배 텐트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던 패트릭은 아일랜드야말로 자기가 뼈를 묻어야 할 곳인 양 얘기하곤 했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여름 한국에 다녀가면서 그를 더블린으로 초대했다. 여긴 자네 나라 사람들이 남북통일 되기 전에 꼭 한번 다녀가야 할 곳이야. 더블린서 벨파스트로 가는 접경지역 목초지에 어떻게 남과 북의 아일랜드 양들이 궁둥이에 파랑 칠 빨강 칠을 한 채 함께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지를 봐야 한다고. 건성으로 들었던 그 얘기를 아내와 잠정적 이혼 합의에 이른 후 회사에 연가를 내고 여행을 떠나온 제주도에서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와서 처음 며칠은 잠만 퍼질러 자다가 하루는 렌터카를 해서 섬 일주를 나섰는데 서부의 한림읍을 지나다가 성이시돌 목장이란 곳을 보게 되었다. 언젠가 이곳을 개척한 아일랜드인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본명이 패트릭 맥글린치인 그는 돼지신부란 별명을 얻을 만치 돼지를 잘 키웠고, 양돈을 바탕으로 양과 말, 소도 키우는 전천후 목장을 일궈내 4·3과 6·25 이후 피폐해진 지역민에게 자립기반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패트릭, 아일랜드, 목축…. 이쯤에 이르러 친구 패트릭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난 방한 때 그가 폰에 저장해주고 간 번호로 국제전화를 걸었다. 더블린은 6시가 채 안 된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는 연구소에서 밤을 새우고 집에 가는 길이라며 전화를 냉큼 받았다.

섬에서 혼자 좀 살아볼까 한다고? 그럼 자넨 여길 당장 다녀가야 해. 제주만 섬이 아니고 여기도 섬이야. 하긴 뭐 지구 자체가 섬이지만. 우주의 섬…. 암튼 여기 와서 내가 이 엄청난 물에 갇힌 작은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고 가면 어느 섬에서도 살 수 있을 거야. 키히힛. 잇새로 숨을 날리는 듯한 그의 웃음소릴 듣자 철은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었다. 비수기였으므로 이틀 뒤 떠나는 유럽행 항공편 예약이 어렵지 않았다.

이미지 크게보기 구자명 소설가

공항에서 패트릭의 집이 있는 더블린 남쪽 외곽의 주택가까지는 택시로 사십 분쯤 걸렸다. 하필 택시 기사가 한때 종합격투기 선수를 지망했던 태권도 유단자여서 철은 알아듣기 쉽지 않은 아일랜드 영어로 떠들어대는 그의 말 상대가 돼주느라 진땀을 뺐는데, 아침술이 다소 거나했던 패트릭은 아랑곳없이 코를 골아 대며 잤다. 차창 너머로 연초록 목초지가 끝없이 펼쳐지기를 반 시간 남짓,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현관문의 색깔과 패턴만 제각각인 빌라형 주택 단지에 도착하자 패트릭은 저절로 깨어나서 말했다. 우린 지금 멀리서 온 손님을 맞았소. 평화의 섬에서 온 손님인데, 싸우고 경쟁하고 그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오. 그가 택시비를 건네며 거스름돈은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하자 기사는 착한 양의 얼굴이 되어 답했다. 물론이죠. 딱 맞는 곳에 오셨습니다! 하늘색 현관문 앞 층계로 패트릭이 올라서자 첨 듣는 새소리가 울렸다. 문이 금세 열리면서 가무잡잡한 곱슬머리 여자애가 아빠! 하고 외치며 달려 나왔다. 그 뒤로 배가 만월처럼 부풀어 오른 새까만 피부의 여인이 흰 이를 한껏 드러내며 웃고 서 있었다.

구자명 소설가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창립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