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정치 풍자 TV 드라마에서 대통령 역을 맡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당선인이 드라마에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열연하는 모습. 크바르탈 95 방송 캡처

극에 달한 양극화·부정부패 일삼는 기성정치권에 대한 반감
변화이미지 새인물에 유권자 환호…“싹 바꿔보자” 파격 선택

정치인 조롱 드라마로 인기얻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선 승리

연예인 정치인 성공한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부패·정치혐오 심각
反부패·포퓰리즘 공약으로 승리

유세 · 토론보다 SNS 소통 선호
수백만명 팔로어 향해 직접 어필

지난 4월 21일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연기자 대통령’이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정치 입문 단 4개월여 만에 현직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진짜 대통령’에 당선됐다.

올해 초까지 그는 정부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는 모습이 SNS에 공개돼 깜짝 스타가 된 뒤 대통령에 당선되는 고교 역사 교사를 연기한 인기 TV 드라마 주인공이었다. 어린아이가 역할 놀이를 통해 마치 그와 같은 인물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우크라이나 유권자는 TV 드라마 속에서 비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젤렌스키를 실제 대통령으로 느끼는 집단 ‘파노플리 효과’를 경험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과테말라의 지미 모랄레스 현 대통령, 필리핀의 조지프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과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등도 젤렌스키 당선인처럼 연기자 출신 대통령이다. 정치 입문 경위와 경력은 다르지만 성공한 연기자 출신 정치인에게선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부조리한 사회, 기존 정치에 대한 극한 혐오, 새 정치에 대한 바람 등 변화의 요구가 거센 사회적 분위기다. 레이건 전 대통령을 제외하곤 포퓰리즘 공약이 먹혀든 것도 특징 중 하나다. SNS를 통해 순식간에 ‘팬덤’ 현상을 일으키는 미디어 환경은 연기자 출신 정치인 출현을 부채질하고 있다.

◇정치 환멸과 차별화된 대응 = 냉전 해체 후 우크라이나는 빈곤과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재벌과 정치권의 결탁으로 부패에 대한 피로도가 극에 달했다. 국민은 일자리와 소득을 잃고 가난에 내몰렸지만 정치권은 해법을 내놓지 못한 채 오히려 부정부패와 비리로 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젤렌스키 당선인은 TV 드라마 ‘국민의 종’에 출연하며 부패한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조롱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도 필리핀의 누적된 부정과 비리를 비판하며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정치에 대한 반감이 커질수록 기존에 본 적 없는 인물에 대한 기대, 이른바 ‘신상품 효과’가 크다”면서 “불신이 클수록 유권자들이 ‘싹 바꿔보자’는 파격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존 정치에 대한 환멸감을 적의가 아닌 유머로 비판한 것도 연기자 출신 정치인의 성공 요인이다. 이들은 타인을 공격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희화화시킬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경직된 사고를 하는 기성 정치인과 달랐다.

◇SNS 팬덤 등 미디어 환경 변화 = 젤렌스키 당선인은 기성 정치인과 달리 대규모 거리 유세나 상대 후보와의 토론, 언론 인터뷰를 자제했다. 대신 직접 제작하고 출연하는 코미디 공연의 표를 팔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공연장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선 경쟁 후보를 비판하며 흉내 냈고, 이는 SNS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유권자들은 그가 유튜브와 트위터 같은 SNS에 게시한 선거 운동 뒷얘기 영상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이런 전략은 마치 선거 운동원 1명이 유권자 1명을 맡아 따라다니며 선거 기간 내내 메시지를 직접 주입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 SNS를 타고 콘텐츠가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모방과 풍자 효과가 더해지자 메시지 선명성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는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 되고 난 뒤에도 300만여 명에 달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들을 상대로 “총리, 외교장관, 국방장관, 안보국장과 검찰총장의 후보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배종찬 인사이트 케이 연구소장은 “최근 SNS는 혁명적 수준의 정치 운동을 가능하게 할 만큼 막강한 파급력을 가진 미디어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반부패와 포퓰리즘 = 젤렌스키 당선인은 “뇌물수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사람은 평생 공직을 맡지 못하게 하겠다”며 ‘반부패’ 공약을 내걸었다. 모랄레스 대통령도 선거 과정에서 “나는 부패하지 않았고, 도둑도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부패와의 전쟁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도 1998년 대선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에스트라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역대 최고 득표율로 당선됐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한 반부패 공약은 실현 가능성이 희박하거나 실제 실현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젤렌스키 당선인이 선거 운동 과정에서 내놓은 여러 가지 정책은 실현 가능성이 작고 세부 이행계획도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모랄레스 대통령도 백지상태의 정치 경력이 선거에선 참신함으로 나타나 경쟁력으로 작용했지만 취임 이후 추진한 정책은 선거 공약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김유진 기자 klu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