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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규·구자명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22) 솜사탕 포플라

대리기사로 내가 나타나자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가래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회사 그만두고 잠이 줄었다
하루 1분씩… 이러다 죽을까
이력서를 들고 집을 나서니
기다렸다는 듯 버스가 왔다

‘시원한 밀짚모자 포플라~’
버스서 흘러나온 이노래는
어릴적 낮잠 들때 들리던…
잠에서 깨 솜사탕을 핥았다

‘시원한 밀짚모자 포플라 그늘 아래 양떼를 몰고 가는 목장의 아가씨~’ 아, 정말 오랜만에 불러보는 노래다. 응? 그런데 내가 왜 이 노래를 하는 거지? 아니다. 버스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를 나도 모르게 따라 했던 것이다. 승객이라곤 나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날 위해 틀어주었는지 모른다. 운전석 거울에 반쯤 비친 기사의 얼굴이 어쩐지 나와 닮았다.

난 이 노래를 좋아한다. 어릴 적 한여름 낮, 마룻바닥에 누워 매미 소리 들으며 막 선잠이 들 때 누군가 부르는 이 노랫소리는 나를 행복한 잠 속으로 빠르게 떠밀었다. 곧 알게 되었지만 이웃 집 누나가 집안일을 하면서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그 누나는 늦도록 시집을 가지 않았다. 영원히 시집가지 말고 내 낮잠을 달콤한 노랫소리로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안 간 것은 아니겠으나 어쨌든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엔 없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둘레가 왜 그리 낯선지…. 심지어 어떤 때는 서럽게 울기도 했다. 그것이 처음으로 겪은 외로움일 것이다. 노랫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파란 하늘에 작은 흰 구름이 풍선처럼 동동 떠 있었고 친구를 불러 모아 뭉게구름이 되었다.

그때를 맞춰 엄마는 솜사탕을 사다 주었다. 그래서일까, 흰 구름만 보면 지금도 혀 밑에 단침이 고인다. 선잠 뒤에 밀려오는 고절감을 달래기 위해선 흰 구름과 솜사탕이 딱 좋다. 뭉게구름이 뭉쳐 먹장구름이 되고 끝내 장대비를 퍼부었다. 마루 끝에 앉아 솜사탕이 눌어붙은 막대를 핥으며 그것이 장대비 같아서 ‘킥킥’ 웃었다. 그게 왜 우스웠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흰 구름은 솜사탕이고 솜사탕 막대는 장대비였다.

차 안에서 또 다른 가수의 노래가 나오는데 그것들 모두 내가 따라 한 좀 전의 노래와 같은 노래로 들렸다. 귀에 들리는 세상의 모든 소리는 알고 보면 한 가지 노래다.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도 한 사람이다. 나 또는 너인 것이다. 나와 너 말고 더 있다는 생각은 쉽지 않다. 그것을 분명하게 안 것은 직장에서였다.

30대의 나는 매우 정직했다. 그러나 주변에선 싫어했다. 바람 앞에 선 갈대가 되라고 했다. 그 말을 받아들여 40대엔 여린 풀처럼 되니 동료들이 멸시했다. 딸과 처가 교육문제로 미국으로 갔기에 더 열심히 일해야 했다.

회사 일이 끝나면 부업으로 대리운전을 했다. 경제가 너무 어려워 대통령도 밤에는 대리운전을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직장회식에 병을 핑계로 빠지고 대리운전을 하러 갔다가 회식을 끝낸 동료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대리운전 요구에 우연히 내가 지명된 것이다. 그들은 놀라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가래침을 뱉으며 돌아섰다.

집으로 돌아와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 며칠을 망설이다가 사직서를 들고 사장에게 가니 사장은 차디찬 눈빛으로 쏘아보며 퇴직금이라도 타 먹으러 왔느냐고 했다. 일전의 회식은 회사가 최종 부도 처리됐다는 소식을 전하는 자리였으며 마지막으로 사원들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했다.

회사를 그대로 그만두고는 거실 탁자 위에 둔 사직서를 밤늦도록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서 잠시간도 줄었음을 문득 알았다. 따지고 보니 회사를 나온 지 두 달 만에 잠시간이 6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었다.

한 달을 더 관찰해보니 하루에 1분씩 잠시간이 줄고 있었다. 한 달이면 30분의 잠이 줄고 1년이면 나의 평균 잠시간인 6시간이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미 한 시간 반 이상을 까먹었으니 이제 남는 시간은 기껏 4시간 남짓, 날수로는 9개월이 채 못 된다. 잠을 못 자면 죽는다. 노인들이 그래서 점점 잠이 적어지는 것이다. 아기들은 하루 종일 잔다. 나도 자야 한다. 오래 많이 자야겠다. 그렇게 해서 살아야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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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직장을 얻어서 전처럼 살면 잘 잘 수 있을 것이다. 이력서를 들고 집을 나섰다. 기다렸다는 듯 버스가 갑자기 나타났다. 오래전부터 내 집 모퉁이에서 날 기다렸던 것 같다.

나는 기분 좋게 버스에 탔다. 원래 이렇게 돼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게 다 술술 풀리지 않는가. 이게 정상적인 것이다. 내가 바라는 삶이다. 잘못된 것은 나의 뜻보다는 남의 요구대로 살았다는 것이다. 흰 구름과 솜사탕, 솜사탕 막대와 장대비가 같다고 웃었던 일과 괜스레 트집만 잡던 직장 동료들의 일도 그 까닭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모두 날 위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정류장에도 서지 않고 흔들림도 없이 조용히 달리기만 한다. 날 새 직장으로 바로 데려갈 것인가 보다. 처음부터 다 그렇게 마련된 일일 게다.

차는 끝도 뵈질 않는 고갯길을 오르고 있다. 노래가 또 흘러나온다. ‘시원한 밀짚모자 포플라~’ 졸음이 밀려온다.


글·그림 = 김의규 화가

한국미니픽션작가회

초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