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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 ‘티켓’

한국영화사에 있어 가장 큰 획을 그은 명장(名匠)을 한 명 꼽으라 하면 누굴 꼽겠는가. 단연 임권택 감독이 아닐까. 임 감독은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받은 영화감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국책영화부터 액션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시대에서 다양한 장르를 포섭하며 100편 이상의 연출작을 배출해 낸 최고의 테크니션이기도 하다. 1962년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 이후로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그지만 진정으로 임 감독의 영화적 비전을 보여주는 작품들은 한국영화 암흑기가 지난 1980년대 중·후반부터 만들어진 영화들이다. 특히 1986년 작 ‘티켓’(사진)에서는 임 감독과 송길한 작가의 눈부신 콜라주를 확인할 수 있다.

강원 속초시에서 티켓다방을 운영하고 있는 지숙(김지미)은 직업소개소에서 세 명의 아가씨 미스 양(안소영), 미스 홍(이혜영), 세영(전세영)을 데리고 온다. 데리고 있던 아가씨 미스 주(명희)가 이젠 나이가 들어 손님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있기에 내린 결정이다. 새로 온 아가씨들은 일자리가 생겨 싱글벙글 하지만 유독 세영만 표정이 어둡다. 다방 경력이 많은 미스 양과 미스 홍과는 달리 세영은 진한 화장도, 틈만 나면 가슴에 손을 얹는 남자 손님들도, 다방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낯설고 서럽기만 하다. 사실 근심의 가장 큰 원인은 그의 대학생 남자친구 민수(최동준)에게서 비롯된다. 좋은 대학을 다니고 있는 그가 세영이 티켓다방에서 뱃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는 걸 알아버리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이다. 지숙은 그런 세영이 못마땅하다. 하는 둥 마는 둥 한 화장에, 구멍가게 주인이나 입을 듯한 옷가지를 입고 마지못해 손님들을 상대하는 세영 때문에 매상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스 양과 미스 홍이 세영 대신 출장도 다녀오고 하는 통에 쫓아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있는 중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새로 온 세 아가씨의 일상을 비추는 데 할애된다. 가게에서 차를 팔고 여관으로 배달을 가고, 몸을 팔아 받아 온 티켓을 지숙에게 내밀면 아가씨들의 수당이 기록된다. 성질 사나운 미스 홍이 가끔 사고라도 쳐서 공치는 날이면 칼같이 수당을 제하는 일도 지숙은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렇게 덧셈 뺄셈이 오가는 하루가 반복되면 곧 기다리던 월급날이 오지만, 손에 쥐어지는 건 한 달 살기에도 빠듯한 푼돈이다. 이들은 그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또 한 달을 저당 잡힌다. 시간이 흐르고 세영은 적응과 자포자기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자신의 몸을 내놓기로 한다. 당장 민수의 등록금까지 보태줘야 하는 마당에 몸뚱이를 아껴서 무슨 소용인지 자책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세영은 그나마 자상하게 대해주는 박 선장을 불러내 밤을 보내고, 이제는 팔 수 있는 몸이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박 선장과의 밤 이후로 세영은 다짐한 것처럼 ‘미친 듯이’ 티켓을 팔기 시작한다. 한 뼘만 한 종이 쪼가리가 세영의 손에 들어올 때마다 갈가리 찢긴 자신의 몸 조각을 만지는 것 같아 비참하고 끔찍하지만 곧 민수와 살림을 차릴 생각에 기분이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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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고 나면 다섯 가지 맛을 낸다는 오미자가 떠오른다. 아가씨들이 경쟁하듯 과시하는 형형색색의 ‘다방패션’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나기도 했다가, 아버지의 약값에 보태라고 시골 엄마에게 금반지를 빼주고 가는 미스 양의 뒷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리다. 어린 세영(아가씨들 중 이름이 붙여진 유일한 캐릭터이기도 하다)을 처연하게 바라보던 영화의 시선이 박 선장과 침대에서 뒹구는 그의 모습을 착취적으로 가두어 버리는 시선으로 돌변하면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영화는 그렇게 착취와 동정을 반복하며 강제 산업화를 거친 사회 변방을 채우는 ‘찌끄레기’ 인생들을 포갠다. 돈만 알던 지숙이 세영을 위해 그를 떠나려는 민수를 설득하려다가 살인미수에 이르고 이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말년을 보낸다는 결말 역시 모순적이지만 또 다른 시선에서 어쩌면 영화는 그를 의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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