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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정치부 선임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전 내놓은 자신의 저서 ‘대한민국이 묻는다’(2017)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로 꼽은 가장 중요한 3가지는 경제, 안보, 통합이었다. 하지만 경제는 엉망이고 안보는 극히 불투명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이게 국정 지지율의 하락을 이끈 동인(動因)이다. 지지율 만회를 위해 문 대통령이 ‘적폐 프레임’을 다시 들고 나왔고 일시적으로 지지층 결집을 불렀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통합이라는 또 다른 국정 과제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대한민국은 불행히도 경제, 안보, 통합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검찰, 경찰, 공정거래위, 국세청, 관세청 등 강제조사권과 수사권을 가진 기관들의 활약상이 유난한 건 그 사회의 통치문화가 건강성을 잃었다는 걸 말해준다. 그간 적폐 몰이로 가장 크게 가슴앓이를 한 건 대기업들이다. 최근 별세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일가의 주택·회사에 대한 압수수색은 공개된 것만 18차례, 이들이 수사기관 포토라인에 선 횟수만 14차례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2월부터 올 3월까지 1년여 동안 17차례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미 전 정권과 전전 정권의 대통령과 주변 인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형을 살았다. 오래전 수사 종료됐던 김학의 사건을 재수사하기 위해 대형 수사단이 구성된 것은 “권력형 비리를 철저 수사하라”는 문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서 비롯됐다.

‘적폐 프레임’은 묘하게 군중심리를 발동시킨다. 그건 아(我)와 비아(非我)의 살벌한 살육전을 몰고 온다는 점에서 과거 중국의 문화대혁명(문혁)을 닮았다. 적폐청산이 경제교체·시대교체·주류세력교체·역사교체 등 ‘4대 교체’와 맞닿아 있는 건 문혁 시대의 ‘4대 구습 타파’를 연상시킨다. 실패한 소득주도성장론에 대한 비판에 눈 감고, 보수세력을 청산해야 할 친일파 후예라고 선동하며, 동맹의 가치보다는 ‘우리민족끼리’를 앞세우는 건 계급투쟁·평등주의·배외주의를 강조한 문혁의 논리와 흡사하다. 문혁 10년의 광풍이 중국 역사를 얼마나 후퇴시켰는지에 대한 평가는 이미 나와 있다. 중국 공산당이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혁을 ‘극좌적 오류’로 규정한 건 마오쩌둥(毛澤東) 사망(1976년 9월)과 함께 문혁이 공식 종료된 후 만 5년도 되지 않은 1981년 6월의 일이었다.

청산될 것은 청산돼야 한다. 문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칭 촛불정부의 적폐가 터져 나오고 점점 더 많은 국민이 정권의 부도덕성에 질리고 있는데도 신 적폐와 구 적폐를 대하는 청와대와 당국의 태도가 너무 대조적이라는 점이다. 산 권력의 우월성을 확보하려 죽은 권력을 사냥하는 적폐청산은 여론 선동의 언어이지 민주주의의 언어는 아니다. 오랜 기간 진보 지식계를 대표해온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최근 “청산을 모토로 내건 개혁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지 지극히 부정적이다”고 한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민을 촛불세력과 적폐세력으로 나누고 갈등과 대립을 부르는 정권에 국정의 정상성을 기대하긴 어렵다. 도덕성을 독점한 듯한 집단의 오만과 오판이 계속된다면 후대는 이 시기 적폐청산에 대해 국민통합을 가로막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한국판 문혁, 광란의 연대기로 기록할지 모른다.

minsk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