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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수 만화가

네팔 소년에게 술심부름 시킨 PD
돈 갖고 달아나면 어떡하나 의심

소년, 다친 몸 끌고 새벽에 돌아와
그가 사온 캔맥주 맛은 생애 최고

타이밍은 과학도 운명도 아닌 울림
인생도 들고 나는 때 아는 게 중요

타이밍이라는 말은 꽤 자주 쓰인다. 짜릿한 뭔가가 있을 듯한 뉘앙스 때문일까. 적절한 우리말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다. ‘최적의 순간’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그런데도 스포츠 중계를 들어보면 ‘기막힌 타이밍’ 소리만 있고 ‘최적의 순간’을 말하는 아나운서는 한 명도 없다.

‘TV에서 하차한 아무개가 재기의 타이밍을…’ ‘타이밍을 놓친 뒷북 대응…’. 온통 타이밍뿐인데 최적의 순간은 끝내 없다. 날아온 영어가 박힌 모국어를 뽑아낸 것이다. 타이밍이라야 문장이 되고 외래어가 끼어야 우리말이 된다.

얄미운 ‘타이밍’은 그러나 엄연한 과학이고 수학이다. 각종 운동경기는 물론 사회 전반에서 ‘완급의 묘’로 각광받는다. 그러나 일기예보처럼 부정확한 헛발질도 한다. 분명히 ‘절묘한 타이밍 터닝슛’인데 아슬아슬 골대를 벗어난다. 타이밍은 과학도 수학도 아닌 그날의 운명이 된다. 타이밍으로 먹고산다는 투자의 귀재가 타이밍에 무릎을 꿇고 빈털터리가 되기도 한다. 타이밍은 가혹한 여신의 장난이다. 어떤 이는 용꿈과 돼지꿈을 한꺼번에 꾸고, 하늘이 준 타이밍을 놓칠 수 없어 복권을 잔뜩 샀는데 모두 꽝이었다고 통탄했다. 이 사람 타이밍은, 잘 맞지 않는 오늘의 운세다.

타이밍은 천의 얼굴로 곳곳에서 우리를 웃기고 울리지만 가끔, 물들지 않은 타이밍이 있다.

모 방송국 PD가 이국의 봄을 찍으러 네팔을 갔다. 지독한 미세먼지에 혼쭐이 나다가 이 무슨 신의 한 수 타이밍이냐. 촬영팀은 신바람을 내며 갔다. 봄은 공기 맑은 산골짜기에도 어김없이 와 있었다. 바위 틈새 이름 모를 풀꽃도 예뻤지만, 무수한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특히 장관이었다. 촬영팀은 모두 텐트 바깥 돌무더기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소 말수가 적은 카메라 감독이 불쑥 한마디 던졌다.

“이런 기막힌 별들의 잔치에 술이 없는가!”

음료수는 풍족한데 알코올류가 없었다. 현지 가이드를 따라온 열두 살 네팔 소년이 자기가 가서 맥주를 사오겠다고 했다. 마을까지 4㎞, 왕복 8㎞ 밤길이다. PD는 잠시 망설이다가 30달러와 손전등을 주었다. 소년은 쏜살같이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보내고 나서 살짝 걱정이 되었다. 보조 가이드라 해도 미성년자다. 마트에서 애한테 술을 팔기나 할까. 모닥불을 피우던 메인 가이드는 전혀 딴 걱정을 했다.

“어쩌자고 그런 큰돈을 주었느냐, 보나 마나 그 돈을 가지고 ‘카트만두’ 같은 큰 도시로 달아났을 것이다.”

PD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니나 다를까. 3시간이 지나고 4시간이 돼도 소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자 모두 텐트로 들어가 잠을 청했는데, PD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오늘 한 아이 장래를 망쳤는가. 가이드 영감이 진작 정보를 줬어야지! 애 부모를 만나 뭐라고 하나…. 주위를 보니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자기만이 아니었다. 가이드 노인은 모닥불 앞에 팔짱을 낀 채 허공만 쏘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2시.

모두가 벌떡 일어났다. 소년이 다리를 절룩이며 돌아온 것이다. 캔 맥주 보따리를 들쳐 메고 지름길로 뛰다가 언덕에서 굴러 한참 동안 기절해 있었단다. 소년은 피가 난 무릎을 매만지며 늦어서 죄송하다고 거듭 고개를 숙였다. 맥주 캔 몇 개가 정말로 찌그러져 있었다. 한동안 말문을 못 열던 PD가 와락 소년을 끌어안았고, 아주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고 한다.

촬영이 끝나고 네팔을 떠나던 날.

카메라 감독이 등산화를 벗어 소년에게 주었다. AD(조연출)는 카메라에 짐을 나르는 소년의 뒷모습 한 컷뿐인데, 자기 개인 돈을 털어 출연료라며 주었다.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소년이 다음에도 꼭 자기를 불러 달라면서, 형편없는 글씨로 이름과 주소, 좋아하는 한국 축구 선수를 적어서 주었다.

훗날 PD는 잠을 못 이룬 그 밤을 이렇게 회고했다.

“캔이 찌그러지긴 해도 그렇게 맛좋게 마신 맥주는 난생처음이었어요. 다 늦은 새벽 시간은요. 내 생애 최고의 타이밍이었어요.”

타이밍은 과학도 운명도 아닌 또 다른 차원의 울림이다. 가슴 뜨겁게 마주치는 손뼉 같은 것이다. 국가도 기업도 동네 빵집도 이런 울림을 윤활유로 발전하고 번성한다.

타이밍을 조금 낭만적인 시각으로 보면 해변의 들고 나는 물때다. 이 ‘물 타이밍’을 모르면 배가 모래톱에 골탕을 먹고, 암초에 찢겨 주저앉을 수가 있다. 그래서 배는 선장을 잘 만나야 한다. 태풍이 오는데도 꿈쩍 않는 야릇한 신념의 선장도 있다, 항해사의 조언도 조타수의 충언도 무시하니 승객들이 대혼란에 빠진다. 뱃길도 하늘길도 기업 경영도 한번 타이밍을 놓치면 반드시 손실이 따르고, 두 번이면 급류에 올라탄 나뭇잎. 세 번이면 이미 배의 주인이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 선장의 비극은, 누구도 그에게 다시는 배를 맡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은 심각한 문제 발생의 경고음이다. 현명한 선장은 아주 고맙게 받아들인다. 체면과 자존심의 손상을 우려할 것은 없다. 승객들의 박수 소리에 모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이 길이 아닌가 봐! 항로 변경!’

그 한마디가 총명을 되찾는 타이밍. 배를 구하고 영원한 선장님으로 추앙받을 수 있는 최적의 순간이다. 배뿐이랴. 인생 만사 타이밍 아닌가. 돼지 삼겹살을 굽고 파전을 부쳐도 뒤집는 타이밍이 맛을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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