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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미 문화부 부장

마블 스튜디오의 첫 여성 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이 페미니즘 논란을 딛고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다. 개봉 3일째 100만, 4일째 200만 돌파로 기록을 이어가다 개봉 18일째 500만 명을 넘었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파일럿 캐럴 댄버스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가며 여성 히어로 캡틴 마블로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알려졌듯이 영화는 마블의 첫 여성 솔로 무비라는 이유만으로 개봉 전부터 페미니즘 영화로 공격받으며 불매 운동과 별점 테러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캡틴 마블’은 페미니즘 영화로 불리기엔 오히려 좀 밋밋하다. 이제까지 우리가 봐온 히어로 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가져와 주인공만 여성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모든 적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캡틴 마블의 힘은 결국 적을 제압하는 육체적인 남성의 힘과 다르지 않다. 새로운 여성 서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여성영화라면 독립영화 주변을 맴돌며 몇 안 되는 상영관에 만족해야 했던 현실을 생각하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 그것도 마블 히어로 물에서 여성이 주인공이라니 의미 있는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시대 변화를 생각하면 여성 솔로 영웅이 이제야 등장했다는 것이 문득 놀랍고, 그렇게 오랫동안 숱한 남성 히어로가 활약하던 무대에 여성 히어로가, 그것도 겨우 한 명 등장한 것이 그렇게 반발할 일인지 안타깝다.

그런데 ‘캡틴 마블’은 첫 여성 솔로 영화인 동시에, 솔로 히어로 영화 중에서 로맨스가 없는 첫 영화이다. 왜 로맨스가 사라졌을까. 강한 여성에겐 사랑이 필요 없다는 말인가. 그것보다는 로맨스가 너무나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시대 변화에 따라 드라마, 영화에서 개성적인 새로운 여성 캐릭터들이 잇따라 등장했지만, 이들은 로맨스 자장 안으로 들어가면 순식간에 전통적인 여성이 되곤 한다. 로맨스는 남녀가 함께 만드는 관계인데, 여성의 사회 진출과 페미니즘 등의 영향으로 여성의 각성은 높아진 반면, 남성의 변화는 더디면서 생기는 엇박자 때문에 새로운 로맨스 관계를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인 올바름’에 대한 감수성이 높은 시대, 결국 로맨스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로맨스 불가능의 정황은 할리우드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현실에서도 뚜렷하다. 버닝썬, 정준영,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바라보는 성 접대 같은 진행형 사건만 봐도 그렇다. 가장 친밀한 관계가 오히려 가장 위험할 수 있다는 공포, 사회적 위치와 겉모습만으로는 누구도 신뢰할 수 없다는 감각은 사랑과 결혼이 평등하고 행복하기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게 한다. 이 맥락에서 문화연구가 김신현경은 ‘이토록 두려운 사랑’이라는 책을 통해 ‘연애불능의 시대’를 선언하기도 했다.

북핵 문제, 경제 위기에 버닝썬만 해도 권력 유착같이 중요한 문제가 넘쳐나는데, 무슨 로맨스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야말로 개인과 개인의 믿음과 소통이 순수하게 가능한 관계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에서 모든 관계가 불가능하다. 남성과 여성을 둘러싼 현실과 감각의 현격한 차이,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로맨스 부재, 연애불능을 넘어 사랑의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c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