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사건에 연루돼 검찰에 의해 기소된 박병대(왼쪽 사진)·고영한(가운데 사진) 전 대법관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上) 검사 조서 증거의 문제점

사법행정권남용의혹 수사때
검찰, 수백쪽 조서로 ‘공격’
검찰 조사받고 나온 법관들
아는 사실 상세히 설명했지만
막상 조서엔 그 내용 사라져

형사소송서 중요한건 증명력
“피고인 검사조서 동의안하면
증거능력 예외없이 부정돼야”

추가수사 이유 조서공개 꺼려
형사소송 전자화 시급한 과제

통상 정치권이 생각하는 검찰개혁은 검경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가 전부다. 그러나 대통령이 인사권을 내려놓지 않는 한 여권의 검찰개혁은 ‘검찰·경찰·공수처 3곳을 상대로 충성경쟁을 시키는 식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정부·여당의 논의와 달리, 법조계가 간절히 원하는 개혁은 조서·영장·기소 권한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법조인들이 형사 절차에서 가장 개선이 시급한 문제점으로 꼽는 건 ‘검사 조서’다. 수사기관의 조서는 밀실에서 수사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다. 영상녹화를 하거나 변호인이 입회하더라도 일단 그 안에 들어선 순간, 밀실 주인인 수사기관의 권한은 막강해진다. 공소가 제기된 후도 문제다. 우리나라는 검사가 만든 조서에 증거능력이 인정되면 유죄증거처럼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크다. 검찰의 방대한 조서 기록이 종이로만 제공되는 탓에 피고인 측의 열람·복사가 더뎌지는 문제점은 방어권에 치명타다.

◇밀실에서 만들어진 검사 조서=검찰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서 조사를 받고 온 판사들은 조서의 조(調)가 ‘꾸밀 조’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를 절감했다고 한다. A 판사는 “검사가 자신이 맡은 조사에서 핵심 키가 될 수 있는 질문을 던졌고, 나는 내가 아는 사실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런데 나중에 조사가 끝난 뒤에 확인해보니 그 조항 자체가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조사의 뼈대를 허물 수 있는 예상 밖의 답변이 나오자 조항 자체를 생략해버렸다는 얘기다. B 판사는 “검사가 내게 적용한 혐의에 대해 죄가 성립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검사가 타이핑을 하지 않았다”면서 “이유를 따져 물었더니 ‘나중에 법정에서 의견서로 제출하시죠’란 답변만 하더라”고 전했다. 피의자에게 유리한 내용은 쏙 빼놓았다는 설명이다. 변호사들은 판사들의 절감이 새삼스럽다는 반응이다. 한 형사전문 변호사는 “검사나 검찰수사관이 온갖 협박과 강압적인 말들을 쏟아 내놓고도 자신들의 발언은 조서에서 빼고, 위축된 피의자가 한 발언 내용만 조서에 기록하기 일쑤”라면서 “변호인이 검찰 측의 발언을 조서에 기록해달라고 요구했을 때 거부하면 조서의 증거능력을 없애도록 형사소송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작성된 검사 조서는 경찰 조서보다 더 쉽게 증거능력을 부여받았다. 검사가 작성한 참고인 진술 조서는 법정에서 참고인에 대한 반대신문에 의해 탄핵되지 않는 한 증거능력을 인정한다. 피의자 신문 조서 역시 △적법성 △실질적 진정성 △특별히 신뢰할 수 있는 상태 요건(이른바 특신성) 등에 문제가 없는 한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특히 피의자 자백이 담긴 신문 조서의 경우 여기에 임의성 요건이 추가될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법조계에서는 검·경의 이중조사를 방지하고 자백 위주의 수사 관행을 깨기 위해서는 모든 조서의 증거능력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지방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형사소송법을 개정할 필요도 없이 당장 법원에서부터 그동안 넓게 인정해온 특신성·임의성 등 요건에 대해 꼼꼼히 따져 좁게 인정하고, 조서의 증거능력을 엄격하게 제한하면 될 일”이라고 설명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 과정에서 불거진 밤샘조사 등의 수사 악행이 대표적인 특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해당한다는 지적이다.

◇“바보야, 문제는 증명력이야”=법조인들은 이 과정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형사소송에서 중요한 건 결국 증거능력이 아니라 증명력이란 주장이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조서의 증거능력에 포인트를 맞추는 건 순전히 검찰 시각”이라면서 “조서 자체가 막강한 힘을 갖길 원하는 검찰도, 검찰이 수집한 증거에 편승하려는 판사도, 검찰 시각을 반영한 언론도 증거능력만 인정되면 당연히 유죄증거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비판했다.

결국 법원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형소법 제308조에 따라 판사의 자유심증으로 검사 조서의 증명력을 판단하는 데 포인트가 맞춰져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 부장판사는 “독일 등 선진국에서는 판사가 법정에서 직접 듣는 데 방점을 두는 직접심리주의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에 피고인의 동의 없이 검사 조서에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 고위법관은 “직접심리주의에 따라 수사기관이 작성한 조서는 피고인이 부동의하면 일체 예외 없이 증거능력을 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분명히 일리가 있다”면서 “수만 쪽에 달하는 검사 조서를 일괄 제출하고 그 조서 내용을 갖고 법정에서 심리하는 것은 형사소송의 본말전도”라고 평가했다.

◇증거개시제도의 실효성 확보돼야=검사 조서가 막강한 영향력을 갖는 또 다른 이유로 변호사들은 일제히 열람·등사 문제를 꼽는다. 공소 제기 후 검찰이 증거를 피고인 측과 법원에 공개하는 제도가 증거개시제도다. 그러나 변호사업계에 따르면 검찰이 “추가 수사를 한다”는 이유로 피고인 측의 열람·등사 신청을 장시간 뭉개거나, 피고인이 여러 명인 사건의 경우 돌아가며 조서를 복사해야 하는 등의 사유로 검찰 수사기록을 넘겨받는 게 ‘하늘의 별 따기’라는 설명이다. 방어권 보장에 치명타다. 이 고위 법관은 “검찰이 기소 후에도 수사를 계속해야 한다는 이유로 조서 공개를 꺼리는 태도 자체가 당사자주의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또 “법정에서 피고인과 검사가 대등한 당사자가 되려면 검사에게 그러한 추가 수사권한을 주어서는 안 된다”며 “이것을 자꾸 묵인해주는 탓에 형사소송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자조가 나온다”고 강조했다.

검찰은 법원의 열람·등사 이행 명령에도 버티곤 한다. 형소법 제266조의4에서 법원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 증거로 쓸 수 없게 하고는 있지만, 골든타임 내에 변호인이 수사기록을 받아보지 못하게 되면 무용지물이다. 미국연방형사규칙에서는 열람·등사를 끝마칠 때까지 공판기일을 연기하는 등 실효적 수단을 두고 있다. 검사 출신 이완규 변호사는 현직에 있을 때 ‘형사소송 이론과 실무집’에서 “증거개시에 대한 검사의 의무 조항을 만들어 이행하지 않을 경우 징계사유의 근거가 돼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판사와 변호사들은 근본적으로 형사소송의 전자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리안 기자 knra@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