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크리스토(Christo)의 ‘달리는 울타리’. 사진 볼프강 볼츠(Wolfgang Volz)&크리스토

작품 중간 중간에 설명문 새겨
관객 스스로 해석할 기회 뺏어

3·1절이 지나갔다. 100주년이라고 해서 그 정신을 보다 깊이 있게 다듬고 정리하고 연구해 세상에 널리 알리고, 깊이 있게 새기는 줄 알았는데 온통 일회성 행사로 점철된 것 같아 유감이다. 보여주는 것은 중하다. 하지만 무엇을 보여 줄 것인가보다도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어 왜 보여주는지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보여주는 것이 본업인 미술관·박물관에서 이런 일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뮤제오그래피(museography)를 채택한다. 이는 고도의 심리적이며 지적인 작업인 동시에 역사와 예술, 과학, 기술, 민족지 등의 전시내용과 대상을 박물관학이 정의한 과정의 일관성 아래 맥락을 갖춰 전시하는 학문 영역이다. 특히 전시는 사물을 나열해 단순하게 관객의 흥미를 끌어내거나 관객이 설명을 듣고 어림짐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해석할 수 있는 기회와 여지를 제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3·1절, 덕수궁 돌담길의 ‘100년 만의 국장’은 모호함 투성이다. 일단 이 한시적인 시설물의 성격이 뭔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또 왜 그곳인지에 대한 이유도 분명찮다. 또 작품이라고 하기엔 설치방식이나 마무리가 매우 서툴다. 특정작가의 작품인지 아니면 집단지성이 창출한 공동체 작품 또는 사회참여적 예술인지 분명치 않다.

이미지 크게보기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보도에 의하면 분명 ‘전시’라고 하는데 전시로서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작가가 누군지도 모르는 설치물이 서울 시내 한복판에 6일간이나 설치돼 있는 것도 문제지만 시민들이 그 설치물의 내용이나 의도를 알지 못할 것이 두려워 친절하게 설치물 중간 중간에 설명문을 인쇄해 놓은 것을 보면 더욱 가관이다. 적어도 작품이고 전시라면 작품에다 설명문을 새겨놓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미술이란 이름으로 온갖 기본도 갖추지 못한 아류 또는 키치류의 작품 아닌 잡물을 보아야 하는 시각적 폭력에 노출당해왔다. 건물 앞에 소위 ‘1% 법’(연면적 1만㎡ 이상 건축물 신축이나 증축 시 건축비용의 1% 이하를 미술작품 등의 건립에 사용해야 한다는 문화예술진흥법)에 의거한 조형물을 비롯해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뜬금없는 벽화와 소위 스트리트 퍼니처라는 고상한 이름의 조악한 물건에 이르기까지, 미세먼지보다 더 강한 시각적 공해를 감내해야 했다.

덕수궁 돌담길을 바삐 빠져나가면서 문득 불가리아 출신의 크리스토(Christo Javacheff·1935~)가 1974년 발표한 ‘달리는 울타리’(Running Fence)가 떠올랐다. 캘리포니아 소노마에서 시작해 마린 카운티에 이르는 장장 약 39.4㎞를 천으로 담을 쳐 놓은 작품이다. 그는 작은 사물부터 커다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천으로 싸는 포장작업으로 유명한 작가지만 그의 ‘달리는 울타리’는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작이다.

그는 2016년에는 이탈리아 북부 댐을 만들면서 생긴 이서호수(Lake Iseo)의 작은 세 섬을 도보로 건널 수 있도록 ‘떠다니는 부두’(Floating Piers)를 설치했다. 이 작품은 16일간 전시됐는데 총 12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해 그해 가장 많은 관람객을 모은 단일전시로 기록됐다.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했다면 표절이고 도용이다. 또 몰랐다면 무지의 소치다. 만약 참고했다면 보다 주도면밀하고 세심하게 마무리해 완성도라도 높였어야 했다.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 맡기라 했던가?” 3·1절 100주년 행사 중 “고종의 국장을 예술적으로 재연하겠다”는 취지도 과연 역사적으로 3·1절에 적절한가를 따져봐야겠지만 적어도 예술적으로 재연하려면 미술가가 참여했거나 제대로 조언해 줄 미술전문가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일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을 기용하는 일은 코드도 맞고 역량도 갖추었을 때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결국 예술작품의 본령인 은유와 상징은 사라지고 설명을 달아 의미를 강요하면서 100년 만의 국장에 나타난 ‘어디선가 본 듯한 옥경이’(수준 낮은 짝퉁을 의미)가 고종을 두 번 죽이고 말았다.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