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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최불암 제로캠프 이사장

선생께서 부인 이야기를 비칠 때마다 저는 슬몃 웃음을 머금습니다. 술을 절제하라는 부인의 당부가 잦아져서 조심스럽다면서도 여전히 술자리를 즐기니까요. 휴일 저녁에 술자리가 있으면 낮부터 부인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애쓴다고 했지요. 반세기를 함께한 부부가 그런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곤 한다는 게 어쩐지 정겹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선생과 부인은 한국 최고의 스타 부부로 살아왔습니다. 부인인 김민자 배우는 중년 이후 드라마에 가끔 얼굴을 비쳤으나 그 우아한 품격으로 스타의 아우라를 지켰습니다. 선생 부부는 배우라는 것 이외에 오랫동안 사회 공헌 활동을 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김민자 배우는 지난 2006년부터 청각장애인 재활에 힘쓰는 기관인 사랑의달팽이 회장으로 활동해왔지요. 지난해 그 공로로 국민포장을 받았을 때 “남편이 30여 년 동안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일을 해 와 함께 봉사에 참여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께 오늘 편지를 쓰는 것은 그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근년에 선생을 뵙고 술자리를 할 때면, 매주 고샅고샅 전국을 다니는 ‘한국인의 밥상’을 화제로 삼았지요. 혹은 선생의 남다른 취미인 시(詩) 읽기로 흥감을 돋웠습니다. 사회 공헌 활동인 제로캠프 이야기는 드물었으나, 선생께서 노년에 가장 힘을 쏟고 있는 일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김민자 배우가 언급한 것처럼 선생께서는 어린이재단 홍보대사 역을 수십 년간 해 왔습니다. 2015년에는 학교 밖 청소년들의 예술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사단법인 ‘제로캠프’를 만들었습니다. 이 단체를 만들 때 주변에서는 ‘최불암’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세울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기존 사회공헌 단체들이 개인을 앞세우다가 여러 부작용을 겪은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제로캠프라는 이름은 무(無)에서 시작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지요.

선생이 법무부 제안으로 교도소에 수감 돼 있는 청소년들을 만난 것이 이 캠프의 계기가 됐습니다. 단체를 만들기 전인 2013년에 이미 김천교도소 재소자 청소년들과 함께 뮤지컬 공연을 준비해 무대에 올렸지요. 난타 및 음악 밴드도 함께했습니다. 이 공연은 지난 연말까지 6년째 이뤄졌고, 올해도 2월부터 준비한다더군요. 전문 공연인들이 재소자 청소년들과 함께 수개월 공연을 연습하는 동안에 교도소 분위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겠지요.

제로캠프를 만든 것은, 이런 문화 운동을 확장하고 싶어서입니다. 가난, 가정해체, 가출과 학교폭력 등의 이유로 학교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에게 문화를 통한 햇살을 비춰 주자는 것이지요. 출산율 저하로 아이들은 줄어든다는데 학교 밖 청소년들은 매년 늘어 현재 40여만 명으로 추정한다더군요. 이들 중에 가정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으나 많은 아이가 세상 속에서 이방인으로 떠돌며 범죄로, 자살로 내몰리고 있지요. 정부가 그들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나 역부족입니다. 민간이 거들어야 하지만, 워낙 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 우리 사회에선 뒷전입니다. 내 아이 교육만 해도 힘든데, 학교 밖 ‘문제아’까지 신경 쓸 수 없다는 게 어른들의 솔직한 고백이지요. 그러나 학교 밖 아이들을 이대로 두고 공동체의 미래를 환하게 그릴 수는 없다는 게 선생의 생각입니다. 위기 청소년을 국가 미래 자원으로 보고 사회안전망 안으로 끌어들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선생은 제로캠프에 사재 수억원을 희사했고, 그것이 기금의 바탕이 됐다는 게 사무국의 전언입니다. 그에 앞서 한 독지가가 상당한 액수의 기금을 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재소 청소년들을 우연한 기회에 접하고 그들의 불우를 살피고 싶었던 분이라고 하더군요. 그 기부가 그동안 캠프 활동을 지속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뜻을 함께하는 개인과 기업이 늘어나야 할 텐데,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위기 청소년 문제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관심도가 낮은 데다가 일부 사회단체의 기금 전용 문제로 다른 단체까지 의혹의 시선을 받는 탓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로캠프가 과연 운영 자금 문제를 잘 해결하며 지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교도소 공연을 함께한 아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사고를 일으키면, 캠프에 비난 여론이 쏟아질 수도 있습니다. 선생으로선 노년에 가만히 앉아서 ‘국민 배우’ 타이틀의 명예만 즐기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확신하는 것은 있습니다. 올해 80이 된 선생께서 후세대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에 우리 모듬살이의 희망이 있다는 것이지요. 기성세대가 뒷세대에게 인간의 예의를 훈계하기 이전에 함께 몸을 부대끼며 그 아픔을 보듬어 주는 것. 거기에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과 소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함께해 온 노배우가 대중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려고 끊임없이 몸가짐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오래 우리 곁에서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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