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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故 임세원 정신과 의사

영정 사진으로 만난 당신은 너무 젊어 보였습니다. 목울대가 절로 뜨거워지더군요. 지난 3일, 조문객을 맞고 있는 당신의 여동생은 의연했습니다. 상가의 예로 초면 인사를 나눴는데, 그 의연함이 더 안쓰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간호사 복장을 한 중년 여성이 제 뒤로 조문을 했습니다. 식장을 벗어나는 그분 얼굴은 눈물범벅이었습니다. 당신이 마지막 순간에 동료 간호사들을 지키려 애썼다는 것. 그분은 그걸 떠올리고 울음을 참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분 뒤로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조문을 했습니다. 들리는 대화로 추정컨대 의대생들인 듯싶더군요. 의사의 일생을 꿈꾸는 그들이 당신 영정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제가 문화계 인사들만 대상으로 해 온 이 편지를 당신에게 쓰기로 한 것은, 세상을 떠나며 남긴 향훈이 모듬살이에 고루 퍼지기를 바라서입니다. 생전에 만난 적이 없으나, 요 며칠 주변 분들의 증언과 관련 기록을 통해 당신 생애를 더듬으면서 친더운 우의를 느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병원에서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숨졌다는 뉴스를 접한 것은 지난해 마지막 날이었지요. 그때 여론이 들끓을 것을 예상했습니다. “걸어 다니는 살인 병기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한다.” 이런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당 대표의 정신 장애인 운운 발언에서 드러났듯, 이 질환에 대한 우리 사회 편견이 뿌리 깊은 탓입니다.

20년 넘게 정신질환 관련 사건을 주시해 온 기자의 예상은, 그러나 빗나갔습니다. 의료진의 안전한 진료를 위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더불어 환자들도 인격적 대우를 받으며 온전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음성이 힘을 얻었습니다. 이는 당신 여동생 임세희 씨가 유족 대표로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들을 향한 사회적 낙인을 멈춰 달라”라고 호소한 덕분입니다.

이제 당신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유족은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지요. 당신이 흉기를 피해 달아날 때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뒤돌아보며 소리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참 통절한 바람입니다. 그런 유족이 사회적 낙인을 걱정하는 것은 당신이 생전에 환자들에게 헌신했던 뜻을 받들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조의금을 의료 발전을 위해 기부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겠지요.

당신은 고교생과 초등생 자녀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바쁜 중에도 부모님을 자주 모셔 밥을 함께 먹으려 애썼던 자식이기도 했습니다. 당신 부모님과 아내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도 기부를 결정했습니다. 당신이 세상에 남긴 뜻을 잘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신이 2016년에 펴낸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는 그 뜻을 절실히 담고 있더군요.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만날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친절한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여전히 까칠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자주 있지만, 적어도 나의 태도를 스스로 의식하고 있을 때는 환자들을 비롯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해지려고 애쓴다.”

당신이 이렇게 애쓰게 된 것은, 정신 질환이라는 불행에 빠져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년간 만성 통증에 시달리다가 우울증을 겪게 됐는데, 이 불행은 자살 충동을 일으킬 정도로 지독했다는 게 당신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때 환자들의 고통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고 했지요.

저는 정신과 의사의 친절이 환자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조금 헤아릴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 정신질환을 앓는 이가 있는 까닭입니다. 정성을 다하는 의사를 만난 덕분에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알려진 것처럼, 정신 질환은 초기에 의사 진료를 받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상담과 약물 복용으로 치유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를 놓쳐서 중증이 되면 사회 부적응 상태가 나타납니다. 이 경우에도 꾸준히 치료 과정을 거치면 회복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느 질환이나 마찬가지로 완치는 할 수 없어도 관리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 관리가 안 되면, 이번 사건에서처럼 범죄자가 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됩니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이 위험만을 강조해 왔습니다. 정신질환 관련 사고가 터지면, 불안을 먹고 사는 분노가 환자들을 낙인 찍어 그들을 골방에 가둬 왔습니다.

이번에 좀 다른 양상이 된 것은, 오로지 당신의 삶과 죽음이 한결같이 보여준 헌신의 울림 덕분입니다. 정신 고통을 안고 사는 이들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 사회가 한 걸음 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당신은 남겼습니다. 이를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이겠지요.

당신은 지난해 12월 SNS에 “힘겨운 치유의 여정을 함께한 환자들에게서 받은 편지가 작은 상자에 가득 찼다”며 “조금 더 큰, 좀 더 예쁜 상자를 사야겠다”고 적었습니다. 거기에서도 혹시 가능하다면, 좀 더 크고 예쁜 상자를 사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여기에 남긴 희망으로 불행을 견디고 이기는 이들의 편지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테니까요.

장재선 기자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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