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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의규·구자명 부부 작가의 미니픽션 - (16) 서로에게 그림자일 뿐

술자리 제일 먼저 왔던 金화백
석달째 보이질 않자 뒷말 무성
백일 지나자 “작업실로 오라”

사실주의에 30년 천착하더니
재벌 사위 친구 조롱에 작심
추상으로 변화시킨 작품 열점

“작품 열 개가 모여 한 작품이뤄
우리 사는 거와 비슷한 그런것
거짓말 안해, 간사하지도 않고”

최근 김 화백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술자리면 제일 먼저 와서 가장 늦게까지 있는 그가 벌써 석 달째 보이질 않자 술자리 친구들의 화제는 자연 그의 부재에 쏠렸다.

혹자는 그가 장기 해외 스케치 여행을 갔을 것이라고 했으나 김 화백의 주머니 형편상 터무니없는 발상으로 결론 났고, 우울한 예술가의 비극적 정황을 점쳐보는 이도 있었으나 지인들은 차라리 악담을 하라며 퉁을 주어 본전도 못 건진 이도 있었다.

아무튼 그 누구도 김 화백의 소식을 모르는 사이 석 달하고도 열흘, 그러니까 꼭 백일이 지나서 김 화백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인즉, 자기가 작품의 한 주제에 빠져 골몰하느라 외부와의 연락도 일절 끊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제 그동안의 작품들을 보여주려 하니 술 한 병씩 꿰차고 자기 작업실로 모두 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서구에서 말하는 소위 ‘오픈 스튜디오’인 것이다.

당연히 친구들은 서울 근교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 주말을 이용하여 모였다. 작업실은 우리들을 위하여 대충 치웠으나 그동안의 치열했던 작업의 흔적이 역력했다. 한쪽 구석으로 밀쳐놓은 몇 무더기의 붓 뭉치, 부러지고 짧게 닳은 콘테, 목탄조각들, 각종 페인팅 나이프 그리고 자극적인 송진 냄새의 물감 용해제, 담배 냄새가 그의 체취인 양 가득했고 그것은 딱히 싫지 않은 이국적이고도 몽환적인 현기증을 나게 했다.



“이렇게들 와줘서 고마워. 오늘은 말이지, 작품 얘긴 않겠어. 그냥 봐. 그리고 각자들 충분히 보고 느끼고 그런 다음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뭐, 그렇게 하자고.”



정말 그의 그림은 바뀌어 있었다. 아니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서 낯설고 기이했다. 그러나 작품의 세계나 등위를 떠나서 사실 이것은 축복이다. 사실주의와 대상성에 삼십 년 가까이 깊이 천착하던 그가 문득 추상과 비대상성으로 돌아서다니. 그의 사실주의적 정서와 표현력은 모두들 알아주던 터다. 그런 객관적 인정과 평가를 어느 순간 팽개치고 전혀 다른 조형세계에 가 있는 그의 용기가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것은 예술가만의 진정한 특권임에 분명했다. 그 누가 그러함을 조장하거나 말릴 수 있겠는가? 삶은 그런 것을 용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런 반동과 부정적인 자를 아주 싫어하기까지 하는 것을 점잖은 사회교육을 받은 이는 너무도 잘 안다.

모두들 가져온 술과 안주로 분위기가 제법 고조된 사이 김 화백은 그동안의 피로와 풀린 긴장으로 앉은 채 기울어져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 그가 한 말에 의하면 이 작품들의 동기는 잘나가는 그의 친구 때문이었다고 했다.

최고 명문대 철학과를 나와서 모기업의 사위가 되었고 어찌어찌 대학교수가 된 그가 온갖 사변적이고 현학적인 학술용어를 쓰며 진정한 예술가는 철학적 작품을 해야 하느니, 그렇지 못하면 예술을 빙자한 ‘딴따라’라며 만일 그런 철학적 작품이 있으면 천금을 주고라도 사겠다고 열변을 토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말은 자기에게 돈도 있고 안목도 있고 예술에 대한 애정도 있으나 자기 지적 수준에 맞는 작품이 없어서 작품 구입을 안 한다는 말이라는 것이다.



“자식, 누가 저더러 그림 사달랬나? 천한 놈, 돈이나 액자 해서 걸어놓으라지.”



안 봐도 뻔했다. 욱하는 김 화백 성질로 보아 본때를 보여 주겠노라며 석 달 열흘 연락을 끊고 작업에 몰두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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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업실 벽면에는 가로세로 1미터 크기의 정사각형 캔버스가 각기 다른 색으로 칠해져 열 점이 촘촘하게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면 정사각형 캔버스 안에는 또 거의 꽉 찬 크기의 또 하나의 사각형이 마치 ‘앙리 마티스’의 ‘고스트 라인’을 연상케 하는 지우고 새로 겹칠하여 그린 여러 겹의 선묘로써 그려져 있었고 색 또한 여러 색의 바림을 쓰면서 빛깔의 그림자로써 통일된 색상의 추구가 의지적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그렇게 빨강, 파랑, 노랑의 삼원색과 주황, 초록, 보라의 이차색, 그리고 무채색과 삼차색의 병렬은 순열과 조합의 무수한 공식을 거느린 도시국가의 성주들만 같았다.

다음 날, 우연인 듯 또는 딱 맞춘 듯 모인 열 명의 친구들은 이 기회에 김 화백의 작품을 한 점씩 장만하자고 합의했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과 존경이 담긴 뜻을 김 화백에게 넌지시 전하자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어, 뜻은 고마운데 저건 열 점이 아니라 열 개가 모여 한 작품이 된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되는가 하면 저 노란색과 보라색의 격한 갈등과 소란스러운 대립이 보이지? 그래서 우리 눈에 금방 띄는 건데 그걸 보색대비라고도 해. 그리고 저 흰색과 검은색 사이에 끼인 회갈색 양옆의 색상과 명도의 차이가 보여? 저걸 연변대비라고도 하는데 놈이 그 자리에 없으면 다른 자리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 거기에는 연변, 색상, 명도 대비가 동시에 복합적으로 이뤄지고 있지. 에, 그러니까… 이걸 뭐부터 어떻게 말해야 되나?… 아무튼 우리네 사는 거와 다 비슷한 뭐 그런 건데 거짓말은 안 해, 간사하지도 않고….”



더듬듯 어눌하게 말하고 어물쩍 말을 마무리 짓는 김 화백은 간밤에 먹다 남은 잔과 병의 술을 모아 마치 새 병인 듯 빈 병에 채워 담아 저 혼자 해장술을 마신다. 그러다 문득 나를 보고 말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알지? 한잔해.”

글·그림 = 김의규 미니픽션작가회 창립회장·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