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일본 화가 가타야마 단(堅山坦)의 ‘구’(邱)와, 함께 출품해 입상한 운보 김기창의 ‘엽귀’(歸·아래). 구도와 배경이 유사하다. 가타야마 단은 운보의 스승인 김은호와 절친했을뿐더러 운보와도 교류를 가져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숲 제공

황정수‘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출간

당대 日화가 그림 200점 수집
도판 120여점 국내 최초 보고

일제강점기 화가 등용문‘鮮展’
심사위원 일본화가들이 맡아
한국 화단에 큰 영향 불보듯

김기창·가타야마 교류 포함
평생 韓 그린 가토 등 소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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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미술의 문을 열었고 미술계의 ‘거장’으로 대접받아온 화가들은 누구에게 그림을 배웠을까? 대개 일제강점기에 그림을 공부하고 작품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스승이나 공부 과정에 관해서는 들은 바가 거의 없다. 특히 미술가에 관한 연구는 당대 사조는 물론 스승의 영향과 극복이 그 이해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한국 근대미술사는 커다란 ‘블랙홀’을 가진 셈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가와 미술사에 관한 책과 글을 써온 황정수(사진) 씨가 바로 이 같은 ‘잃어버린 퍼즐’의 조각을 맞추는 ‘일본 화가들 조선을 그리다:일제강점기 한일미술교류’(이숲출판사)를 펴냈다.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미술 쪽에 빠져 오랫동안 연구해온 황 씨는 5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강점기 한국 미술계를 지배하며 영향을 미친 일본 화가들에 관한 자료를 근 20년간 200여 점 모았고, 이제는 반쪽짜리 우리 근대 미술사의 공백을 메워나갈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겨 책을 내게 됐다”고 말했다. 744쪽에 달하는 책에 소개된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 작가들의 행적은 물론, 120여 점의 도판 대부분은 국내에 처음 보고되는 것들이다.

역사학이나 문학 등 대부분 인문학의 경우 선배들의 행적과 작품에 대해 후학들의 연구와 비평이 끊이지 않았다. 미술계는 예외 지역이라 할 만하다. 황 씨는 “초기 한국 근대 미술가들이 일본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고 그들의 실력이 우월했다는 걸 들추는 게 불편해진 나머지, 해방 후 그들이 돌아가고 작품을 수집해놓은 미술관도 없었던 게 지금까지 거의 연구가 되지 않은 원인”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초기 근대 화가들이 미술대학과 미술계에서 주축이 되면서 후학들의 이러한 연구에 대한 압박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황 씨는 “연구할수록 일본의 영향이 드러나면서 정체성의 혼란이 왔을 테고, 알면서 말을 안 하기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책에 실린 일본 화가들의 도판을 보면,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앞선다. 황 씨는 “공모전인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이 1922년부터 해방 직전까지 23회가 열렸는데, 화가로 출세하는 등단무대였다. 일본 화가들이 심사했고 응모자의 절반 이상은 일본 화가였으니 한국 화가들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어느 일본 화가가 아무개 한국 화가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꼭 집어 말하진 않는다. 황 씨는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기도 하지만, 그걸 얘기하자 하면 한도 끝도 없고 독자들이 짐작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미술계를 주도한 주목할 만한 일본 화가는 한국 최초의 미술학원 양화속습회(洋畵速習會)를 연 야마모토 바이카이(山本梅涯), 조선남화원을 운영한 구보타 덴난(久保田天南), 당시 경성에서 일본인 화가들의 중심 인물이었던 시미즈 도운(淸水東雲), ‘선전’에서 가장 조선적인 화풍을 보였다고 평가받았고 운보 김기창과 영향을 주고받은 가타야마 단(堅山坦) 등이 있다. 이들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인 화가 중에는 조선의 아름다움에 빠져 작품활동을 했던 이들도 적지 않다. 가토 쇼린(加藤松林)은 한국에 와서 그림을 배워 ‘선전’ 심사위원까지 지낸 화가였고 평생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만 그렸다. 황 씨는 “일제강점기였지만 한국에서 활동하고 한국 풍경만을 그렸다면 한국미술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참고자료로라도 써야 하는 화가들인데 아무런 연구가 없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 책을 준비 중인 황 씨는 “반쪽짜리 미술사를 복원해야 우리의 현재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만큼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