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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왜 창제 직후, 즉 1443년 12월 즈음에 바로 훈민정음을 시행하지 않았을까? 창제한 지 무려 2년 10개월여가 지난 1446년 음력 9월에야 반포하고 공식 시행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일차적인 대답은 검증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온통 한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새 문자를 만들었으니, 그 문자가 매우 우수한 글자라는 것을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됐다.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있는 요동으로 신숙주 등을 여러 차례 보내 정음 음운학의 특성을 자문하게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1445.1.7.). ‘용비어천가’를 짓게 함으로써 정음의 실용성을 실험해 보게 한 것도 이 시기였다(1445.4.5.).

그런데 창제에서 반포까지 2년 10개월은 세종 개인에게 큰 시련기였다. 우선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왕 자신의 시력이 심각히 손상됐다. “옛사람들은 친구가 죽거나 눈이 어두우면 통곡한다고 했다. 내 눈동자를 가리는 막이 있어서, 앞에 서 있는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는 한탄처럼, 당시 그는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

연이은 흉년, 집단강도 출몰, 잦은 인사 실패로 인한 민심 이반도 방치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두 아들이 한 달 간격으로 사망하고, 그 후유증으로 의지하던 왕비까지 그의 곁을 떠났다. 세종이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져 ‘내가 지존(至尊)의 임금이지만 가족의 비극에 대해서는 손쓸 바를 모르겠다’며 인간적 무기력함을 호소한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세종 정치의 겨울’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세종실록’을 읽을 때면 아널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한 대목이 떠오른다. “옛적에 벌거벗은, 집도 불도 모르는 야만인의 한 무리가 열대지방의 따뜻한 고향을 떠나서, 북쪽으로 향했다. 밤 추위가 시작되자 그들 중 일부는 걸음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돌아갔고, 헤매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던 사람 중 소수의 무리가 살을 에는 듯한 찬 공기를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마침내 ‘인간 능력의 가장 고귀한 부분’ 즉 발명하는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미지 크게보기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그들 소수는 처음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문명을 향한 위대한 전진을 하게 됐다”는 토인비의 말에서 세종 정치의 겨울을 연상한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 때문이었다. 만약 세종이 자신의 건강 악화와 가족의 불행에 좌절하고, 내우외환에 힘들어하며 ‘훈민정음 해례본’ 제작 작업을 그만뒀다면 어찌 됐을까? 아마도 왕의 죽음과 함께 어렵게 창제한 훈민정음이 역사 속에 묻혀버렸을 수도 있다. 제아무리 중요한 국가 사업도 그 일을 주장하고 추진하는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면, 최고 권력자의 교체와 함께 무산된 경우가 역사에는 수없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1446년 음력 9월 상순, 즉 한글날 즈음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간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세종의 전략은 유교 철학의 핵심인 ‘음양오행의 원리’를 끌어오는 것이었다. ① 우주를 관통하는 유일한 원리는 음양오행이다. ②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것치고 이 음양오행의 원리를 벗어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③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목소리 나는 곳, 즉 음성구조를 본떠서 만든 훈민정음은 바로 우주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치, 즉 음양오행의 이치에 부합된다는 삼단 논법이 그것이다.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보편 명제(음양오행)를 제시한 다음, 거기서 파생된 자연스러운 연결고리를 끌어내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을 도출해낸 것이다.

정인지 등 집현전 8학사를 비롯해 많은 유교 지식인이 정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활용에 앞장선 것은 바로 이 논법과 철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이 참아내기 힘든 최악의 역경을 참아내며, 자기 소명의 마무리 작업을 하는 모습을 회상하며 나의 소명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