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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용 前 외교부 차관

핵무기 폐기 낙관할 수 없는데
방대한 군사합의는 허점투성이
서해5도·수도권 방어 더 취약

‘무력증강 협의’ 합의도 불씨
戰力의 질적 우위 지장 받아
北 善意 기댄 安保실험은 위험

추석 전의 평양 남북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협상이 다시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이 재추진되고, 미·북 정상회담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미 양국이 일관되게 요구해온 비핵화 관련 신고·검증에 대한 북한의 언급은 여전히 없는 만큼 전망을 낙관할 수는 없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 결과 중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군사 분야 합의다. 6개항 22개조에 붙임 문서가 5개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 속에 우리 안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먼저,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북한에는 아무런 손해가 없고 우리 군의 손발만 묶는 조치다. 핵무기 못지않게 위험한 군사적 위협은 수도권을 겨냥하고 있는 북한의 장사정포다. 지난 십수 년간 우리 군은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24시간 정찰이 가능한 무인기와 지하시설 타격용 벙커버스터 등 효과적인 대응 수단을 확보했는데, 이번 합의로 무용지물이 돼 버렸다. 군사분계선(MDL) 가까이 무인기를 띄우지 못하면 우리 군은 눈뜬장님이 된다. 미국의 군사위성이나 고공 정찰기로 대체할 수 없는 핵심 방어 능력이 무력화된다. 또, 북한의 장사정포를 겨냥한 우리 공군기의 공대지 사격훈련도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엄청난 제약을 받게 됐다. 북한의 공격 능력은 그대로 둔 채 우리의 방어 능력만 줄인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 수역에서 포사격과 해상 기동훈련을 금지한 조치도 서해 5도 방어에 큰 문제를 일으킨다. 서해 5도를 지키는 것은 우리 해군과 공군, 백령도의 K-9 자주포 부대인데, 이번 합의로 해군과 포병부대의 실사격훈련을 못 하게 됐다. 군은 훈련이 생명이며 평소 훈련하지 않은 임무는 실전에서 수행할 수 없다. 우리 포병과 해군이 유사시 잘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더욱이 서해 평화수역과 해주 직항로에 관한 후속 협상에 따라 우리의 방어력은 더 취약해질 수 있다. 근본적으로 NLL 기준 남쪽 85㎞, 북쪽 50㎞에 선을 긋기로 한 합의는 불공평할 뿐 아니라 북한의 NLL 무력화 시도에 악용될 위험성이 크다.

비무장지대(DMZ) 내 경계초소(GP)를 남북 동수로 11개씩 철수하기로 한 것도 형평에 어긋난다. 북한의 GP는 160여 개, 우리는 60여 개뿐이므로 이런 식으로 줄여나가면 우리 GP를 다 철수해도 북한은 100개 가까이 남게 된다. 물론 우리 군이 그런 식으로 협상하지는 않겠지만, 북한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례를 결코 공짜로 양보하지 않으므로 GP 철수 문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항에서 이득을 취하려 할 것이다.

이번 합의에서 남북이 무력 증강 문제를 협의해 나가기로 한 것은 앞으로 두고두고 커다란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추진 중인 한국형 3축 체계는 북한 핵 위협을 막을 유일한 방안인데 만에 하나 지장을 받게 된다면 큰일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남북 간의 군사적 균형은 재래식 군사력 세계 4위인 북한의 양적 우세를 우리의 질적 우세로 상쇄하는 것인데, 첨단무기 개발과 도입을 못 하게 되면 균형을 맞출 방도가 사라진다. 벌써 북한은 우리의 첫 3000t급 잠수함 ‘도산안창호함’ 진수식에 대해 ‘판문점 선언에 배치된다’며 비난했는데, 앞으로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북한의 핵무기를 빼놓고 남북 간에 무력 증강 문제를 따지는 게 어불성설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비난은 말이 안 된다.

앞으로 무력 증강과 대규모 군사훈련, 정찰행위 중지 문제, 서해 평화수역과 공동어로수역 문제, 해주 직항로와 제주해협 통과 문제, 한강 하구 문제 등은 후속 협상을 열어 다루게 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철저히 해야 한다. 특히, 북한 조치에 대한 확실한 검증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합의서의 공식 명칭이 ‘역사적인 판문점 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인 만큼 판문점 선언 비준에 앞서 이번 군사 분야 합의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안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중차대한 일이다. 장사정포 대처가 약해지면 수도권 주민, 서해 5도 방어가 약해지면 서해 5도 주민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또, 필요한 훈련을 못 하게 되면 우리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북한의 선의만 믿고 군사적 대비를 소홀히 하는 일은 결코 해선 안 된다. 안보는 실험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