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박서보의 ‘묘법(描法) 43-78-79-81’(왼쪽 사진)과 하종현의 ‘접합-7’(오른쪽).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연 ‘한국의 단색화’ 전에 걸렸던 작품들로 이 전시 후 해외 화단에서도 단색화를 주목하게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작년부터 거래 물량 줄어들고
가격 떨어져 경매에서 턱걸이

최근작보다는 초기작품 선호
팔릴 만큼 다팔려 매물 드물어

미술사적 성찰 없이 스타일化
마케팅 차원 붐 형성도 한몫

‘한국적 추상’으로 불리며 21세기 들어 우리 화단의 ‘대세’이자 세계 미술시장에서도 자리를 잡는 것으로 보였던 ‘단색조 회화’가 경매 현장에서 거래 물량이 줄어들고 작품가도 주춤거리는 등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힘을 못 쓰고 있다.

지난달 27일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묘법의 박서보, 화선지 작업으로 유명한 권영우, 검은 갈색이 화포에 스며들어 일체가 되는 윤형근, ‘오리’로 유명한 이강소, 신문지를 볼펜으로 가득 칠해 마모시키는 최병소 등의 단색조 회화 작품이 추정가에 턱걸이 낙찰됐고, 마대 틈새로 물감을 밀어내는 하종현의 작품은 아예 유찰됐다.

물론 홍콩 경매에서 김환기(1913∼1974)가 1972년 그린 붉은색 전면점화가 낙찰가 85억 원을 넘어서면서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다시 썼지만 같은 추상이어도 그의 그림은 단색조 회화로 분류되지 않는다. 단색조 회화와 시대적 배경은 물론 미학적으로 다르다.

단색조 회화의 퇴조가 가시화된 것은 지난해부터다.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지난 11년간의 낙찰 총액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낙폭이 심하게 컸던 작가로 박서보, 윤형근, 하종현, 정상화 등 단색조 회화 작가가 꼽힌다. 단색조 열풍을 이끌었던 박서보의 경우 2016년 141억 원에 달했던 낙찰 총액이 2017년에는 53억4000만 원에 불과해 전년 대비 37.8%에 그쳤고, 정상화도 2016년 133억5000만 원에 달했던 낙찰 총액이 2017년에는 58억70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44%에 그쳤다.

단색조 회화 거래에 이처럼 빨간불이 켜진 것을 두고 화단에서는 가장 먼저 작품 고갈을 꼽는다. 단색조 회화의 경우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제작된 작품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데 당시 제작된 작품이 많지 않고 그나마 팔릴 만큼 다 팔려나가 매물로 나오는 작품이 없다는 것이다. 유명 단색조 화가들은 최근에도 꾸준히 작업하고 있지만 컬렉터 입장에서는 이미 변화하고 스타일화된 근작보다는 초기작을 더 선호한다.

또 정체성도 문제다. 단색조 회화의 붐은 진지한 미술사적 고민과 성찰 없이, 미술시장의 마케팅 차원에서 형성됐다. 일단 단색화의 용어 정리조차도 제대로 돼 있지 않다. 1970년대 비평가 이일이 당시 그림을 ‘모노크롬화’라고 지칭했고 이를 번역해 ‘단색화’라는 말이 만들어졌지만, 그 이후 단색화에 대한 개념과 미학적 배경이 정리되지 못했다.

사실 미술품이나 특정 경향의 미술이 미술 시장에서 주목받기 전에 필수적인 것이 미술사적, 미학적 검증이다. 미술애호가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위해서도 중요한 절차다. 하지만 여전히 단색조 회화는 영어의 모노크롬(Monochrome)의 번역어인 ‘단색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는 미술관 등 미술사적 담론을 생산하고 검증하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기관이 아닌 컬렉터들의 관심과 기호, 투자 가치 등등을 더 중시하는 화상들이 그 붐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특히 단색조 회화를 동양적 수행의 사상이 가미된 한국적 추상이라고 하면서 서구미술과의 차별화도 이뤄내지 못했다. 서구현대미술의 상관성과 양식적 차이점에 대한 세밀한 비교분석도 없었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는 “해외에서 인정하는 일본의 구타이(具體)나 모노하(物派)처럼 세계미술사에 편입되려면 미술관 전시와 학술 세미나 등이 선행돼야 하는데 단색화 붐이 일게 된 것은 마치 증권시장 작전세력처럼 몇몇 유명 화랑들이 단색조 회화에 올인하면서 비롯됐다”며 “꾸준히 한국 미술의 세계화를 시도하려면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실이 1980년대 YBA를 세계 주류 미술로 밀어올린 전략과 전술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화단과 평단에서는 한국의 단색조 회화에 대한 해외에서의 관심을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폭을 넓게 보고 맥을 같이하는 서승원, 최명영, 한영섭 등의 세대와 김택상, 김춘수, 문범, 민병헌, 박기원, 천광엽 등에 이르는 일련의 중견작가들을 함께 묶어 하나의 사조로 맥락화하는 연구와 실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이경택 기자 ktlee@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