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미숙 논설위원

때로는 하나의 용어나 개념이 특정 현상이나 역사의 흐름 전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북핵 폐기를 둘러싼 협상사를 볼 때, 가장 성공적인 조어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즉 CVID다. 북핵 폐기의 방법과 목표까지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6자회담의 최대 히트상품이라 할 만하다. CVID의 위력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지명자가 과거 25년의 미·북 핵 협상사를 실패의 역사라고 규정하면서도 “실패의 매듭을 끊고 CVID를 이끌어내겠다”고 밝힌 데서도 잘 드러난다. 북핵 폐기를 위해 과거 행정부와 다른 접근을 하겠다고 주장하면서도 CVID 개념의 유용성은 인정한 것이다.

북핵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게 되돌릴 수 없도록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때인 2003년 5월 5일 미 국무부 대변인의 정례 브리핑에서 처음 나왔지만, CVID란 약어를 만든 인물은 6자회담 한국 측 초대 수석대표인 이수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그는 2003년 11월 워싱턴 한·미·일 3자 협의 때 이 약어를 처음 썼다고 저서 ‘전환적 사건’에서 밝힌 바 있다. 한국인이라 영어로 길게 얘기하는 것이 불편해서 머리글자만으로 축약했는데, 미국 측 인사들도 “당신이 만든 표현”이라며 ‘저작권’을 인정해주었다. 중국도 약어의 편리함을 인정하며 사용했지만, 러시아는 사용하지 않았고, 북한은 “패전국에나 쓸 수 있는 용어”라며 반발했지만, 점차 보편적으로 사용됐다. 6자회담이 진전되면서 송민순 외교장관의 이니셜을 딴 S 플랜,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이름을 딴 라이스 플랜 용어도 등장했지만, 이내 묻혀 버렸다.

1990년대 1차 북핵 위기 때엔 일괄타결(package deal)이란 용어가 유행했다. 1993년 11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 때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패키지 딜을 얘기하자 김영삼 대통령은 “DJ(김대중)가 쓴 표현”이라며 거부했다. 이때 미 측이 기지를 발휘해 “철저하고 광범위한 접근(through & broad approach)”으로 고치자, 회의가 이어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패키지 딜은 김대중 정부의 포용정책으로 현실화하는 듯했으나 북한이 비핵화 속임수로 일관해 빛을 잃었다. 이제 북한에 CVID를 더 확고하게 관철시키는 것은 한·미 양국의 공동 숙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