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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우 경희대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火病 전문가

감정은 선악이 있는 게 아니다
어떻게 활용하느냐로 나뉠 뿐

분노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감정
때로는 성숙하게 하기도 한다

화해 통해 씻어낸 분노의 자리에
어떤 감정을 채워 넣을지가 중요

아픈 사람들이 찾는 병원 진료실 한구석에서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고통이나 질병의 원인이 사람마다 달라서인지, 그 가운데는 신체적인 원인으로 인한 경우도 있고, 그 사람이 겪은 스트레스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사회적 문제를 통째로 가지고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나의 진료실은 화병(火病)클리닉이다. 그래서인지 매일 우리 사회의 억울함과 분노를 접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는 ‘화병’이라는 독특한 병이 있다. 울화병(鬱火病)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서구에서는 한국 문화와 연관이 있는 문화 관련 증후군이라 하여 ‘분노증후군(Anger Syndrome)’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화병이라고 설명되던 분노증후군도 이제는 그렇게 많이 쓰이지 않고 있다. 분노가 지역의 문화와는 특별히 관련이 없는,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병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의 병은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라는 병명으로 대체돼 쓰이고 있다. 물론 ‘화병’과 ‘간헐적 폭발장애’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

화병이 억울하고 분한 것을 참으면서 나타나는 가슴 답답함, 치밀어 오름, 얼굴의 열감(熱感) 등 신체적 증상에 초점을 맞춘 반면, 간헐적 폭발장애는 억울함과 분함을 밖으로 표출하면서 나타나는 언어적·신체적 공격 행동이 특징이다. 진료실에서 20여 년을 보내면서, 우리나라 역시 화병에서 간헐적 폭발장애의 모습으로 바뀌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또, 화병의 진단 기준도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 이전에는 화병 특유의 증상을 기준으로 진단을 내렸지만, 요즘은 분노 행동을 진단의 요점으로 삼고 있고, 6개월 이상의 시간 기준도 무의미해지고 있다. 그래서 ‘급성 화병’이나 ‘분노 폭발’과 같은 진단 용어가 병원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참고 지내오면서 그것이 미덕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치받고,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미워죽겠어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그래도 같이 살 수밖에 없잖아요.” 10여 년 전까지 진료실에서 만났던 화병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오륙십 대의 주부가 화병의 주 대상이었고, 참는 것에 이골이 나서 견뎠지만, 몸이 더 이상 받쳐주지 못해 찾아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증상만 없다면 견뎌 보겠다고 한다.

“어떻게 참아요? 참으면 해결되나요? 그나마 이렇게 소리라도 내야 해결되는 것 아닌가요?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요. 그래도 화를 내고 나니 후회가 돼요. 그 순간을 잘 넘겼어야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요즘 화병클리닉에 스스로 화병이라고 호소하면서 방문하는 환자의 모습이다.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이 화를 낸 뒤에 후회하면서, 화를 참는 방법을 알고 분노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방문한다. 하지만 사회적 분노를 참기는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20년 전 화병 관련 책을 처음 썼을 때, 앞으로 화병이 줄어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쌓이는 분노가 줄어들고, 자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내는 사회가 되면 화병은 줄어들 것이라는 진단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그러나 지난 1일 자 어느 신문사의 사회면 헤드라인을 장식한 제목은 ‘성난 대한민국… 새해엔 화 좀 줄입시다’였다. 화병클리닉의 진단도 이와 비슷하다. 화병은 이제 신체적인 고통에서 폭발하는 행동으로, 개인의 고통에서 사회의 병리로 그 양상이 바뀌고 있다. 화병은 그 모습이 변하여 사회의 현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러나 감정은 기능(機能)이다. 감정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 드러나는 현상이고,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는 것이다. 감정은 선악(善惡)이 있는 게 아니다. 그 감정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선악이 나뉠 뿐이다. 따라서 드러나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 감정은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다. 분노 또한 마찬가지다. 화병을 분노로 인한 병으로 인식하다 보니, 모두들 분노를 나쁜 감정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분노는 인간의 생존에서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고, 이 감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는 측면이 있다. 때로는 인간을 성숙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귀에 못이 박이게 들으면서 잘못할 때마다 매를 맞으며 자란 30대의 한 청년이 있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좋은 학교와 직장을 다녔다. 하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모습을 견디지 못해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늘 불만에 차 있었다. 잘못된 일을 보면 시비가 붙고, 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에게 향했던 분노를 고스란히 사회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청년과 상담을 하면서 과거로 돌아가 보았다. 아버지로부터의 폭력이 고스란히 분노의 감정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고, 이 분노는 언제든 밖으로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년 가까이 분노에 쌓여 만나지 못한 아버지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아버지 역시 그 시절을 후회하고 있었다. 또 용서를 구했다. 청년 역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 속에서 타고 있는 분노의 감정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노의 씨앗을 없애면서 분노는 줄어들었다. 언제든 분노가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벗어난 것이다. 청년에게는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씻어낸 분노의 감정 빈자리에 어떤 감정을 다시 넣느냐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청년에게 분노를 대신할 다른 감정의 기능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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