興이 철철 恨이 절절… “세월을 업고 놀자”

이미지 크게보기 지난 13일 대전 서구 용문동 대전한문교사연수원에서 ‘비가비 국악예술회’ 회원들이 손영준(가운데 북채를 잡은 이) 회장의 지도를 받으며 판소리를 연습하고 있다. 김호웅 기자 diverkim@

판소리 모임 ‘비가비 국악 예술회’

판소리 가사 희로애락 담겨있어
메마른 감정 깨우는 종합 예술
몰입할수록 몸이 저절로 반응

소리 수련, 전신운동과 마찬가지
성대·발성 좋아지고 뱃심도 튼튼

경쟁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
허탈감 느끼는 중장년에 맞아

“세월아 세월아 세월아 가지 마라, 아까운 청춘이 다 늙어 가는구나, 헐일을 허면서 놀아보자…” 지난 13일 오후 대전 서구 용문동 대전 한문교사 연수원 강의실. 13명의 남녀 소리꾼이 구성진 목소리로 ‘충효가’의 한 대목을 부르고 있다. ‘소리 스승님’ 손영준(66) 비가비 국악예술회장이 “좀 더 입을 크게 벌려서 다시 해보자”며 북을 덩덕쿵 두드린다. 합죽선을 멋들어지게 펴든 제자들이 어깨를 들썩이며 우리 가락에 빠져들었다. 단전에 힘을 준 복식호흡으로 시원하게 내지르는 발성이 이어지면서 다들 얼굴이 상기됐다. 굵고 탁한 듯하면서 가슴을 울리는 애절한 소리에 스스로 도취된 듯 표정마다 흥과 신명이 가득하다. 바깥은 한겨울이지만 실내는 이미 봄이다. 세월을 역주행한 듯 황혼의 얼굴에 청춘이 꽃을 피운다.

이곳은 대전 지역 판소리 동호인 모임인 ‘비가비 국악 예술회’ 회원 중 일부가 주 1회 모여 소리를 갈고닦는 현장이다. ‘비가비’는 조선 시대 양반 중 판소리에 능하며 학식과 예기를 겸비한 선비를 일컫는 말로 지난 2007년 모임이 창립됐다. 모임을 이끄는 손 회장은 원래 38년 경력의 금융인이었다. 수협 본점 영업부장, 강남권 지점장을 거쳐 지역 본부장을 2번이나 지냈으나 50대 초반 알게 된 판소리의 묘미에 빠져 지금은 각종 국악 경연대회를 휩쓸고, 후학을 양성하는 국악인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53세 때인 2004년쯤 은퇴 이후가 고민되더라고요. 우연히 접한 판소리 가사가 오묘하게 와 닿고 가슴속 묵은 체증까지 시원해지는 것이 좋아서 본격적으로 전주를 오가며 소리 공부에 나서 정성을 쏟았습니다. 일주일에 3∼4차례 전주를 왕복해 대가들을 사사하고 하루 5시간씩 산에 올라 수련했습니다. 2008년 공주 박동진 명창명고 대회에서 최고령으로 신인부 장원에 오른 다음부터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지난 2012년 회갑의 나이에 최대의 목표였던 흥보가 완창을 해냈습니다.”

손 회장은 요즘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신의 호를 딴 정왕판소리연구원을 운영하며 대전 지역 5곳에 출강하고 있고, 대전 동구문화원 부원장도 맡고 있다. 각종 위문 공연과 판소리 문화 강좌, 지역 축제 참여 등을 통해 판소리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지난 2014년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늦깎이 소리꾼으로 그의 인생 2모작 스토리가 소개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후 각종 강연을 통해 지혜롭게 인생 후반을 개척하는 노하우를 전수하는 데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70여 명의 비가비 국악예술회 회원은 주로 5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중장년층이 대부분이다. 평범한 주부부터 대학교수, 기업인, 언론인, 금융인, 공무원 등 화려한 전직을 자랑하는 경력의 소유자들까지 다양하다. 전통 소리의 맛에 푹 빠진 30∼40대 젊은 직장인과 전문직 종사자도 활동 중이다.

회원들은 하나같이 판소리 예찬에 입을 모은다. 류재성(67·법학박사·전 수자원공사 교수실장) 씨는 2009년 입문한 최고참이다. 2012년 고창 전국판소리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지난해 11월 흥보가를 3시간 동안 완창해 주변을 놀라게 한 실력파다. 류 씨는 “판소리는 상대방과의 경쟁 없이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목표에 도전할 수 있는 분야”라며 “퇴직 전후 정신적인 허탈감에 빠지기 쉬운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데 적합한 취미생활”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송화순(70·전 대전 MBC 보도국장) 씨는 “4년 전부터 손 회장의 지도로 판소리를 배우는데 요즘은 흥보가의 화초장 대목은 너끈히 소화할 정도로 기초를 닦았다”며 “소리 수련은 전신운동이나 마찬가지로 혈액순환, 심폐기능 강화, 치매 예방, 스트레스 해소 등 심신 건강도 지킬 수 있다. 송년회가 많은 연말이 되면 내 얼굴 보기 힘들어질 정도로 여기저기서 불러준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상희(여·48·카페 바리스타) 씨는 “이제 1년 차에 불과한 막내로 입만 벙긋벙긋하는 수준이지만 인생을 계절에 빗대는 사철가의 가사를 음미하면 할수록 감정이 북받치고, 몰입할수록 몸이 저절로 반응하게 된다”며 판소리가 주는 ‘무한 매력’을 털어놓았다.

이현나(여·56·한문교사대전연수원 원장) 씨는 “판소리를 하게 되면 성대가 튼튼해지고 강해진다”며 “강의가 직업인데 뱃심이 강해지고 발성이 좋아져 직업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웃었다. 4년째 열성적으로 소리 공부에 빠져 있는 유혜주(여·48·회사원) 씨에게 판소리 수궁가의 토끼 화상 그리는 대목을 청했다. 유 씨는 따로 손 회장에게 개인 레슨을 받고, 각종 대회에 도전할 정도로 촉망받는 수제자다. “화공 불러라, 토끼 화상을 그린다, 연소왕, 황금대, 미인 그리던 명화사…” 빠른 중중모리장단의 곡조가 저절로 좌중의 신명을 돋운다.

손 회장은 판소리를 일종의 학문이나 문학으로 여긴다. “판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현대사회의 메마른 인간감정을 일깨워 공허함을 채워주는 훌륭한 예술입니다. 판소리에 담겨 있는 고전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정신적·육체적 건강에도 도움이 됩니다. 민족 고유의 해학, 교훈, 명언이 가득 담겨 있어 아동·청소년 교육에 큰 효과가 있는데 학교 음악 교육에도 판소리를 도입하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손 회장은 인생 2모작을 잘 준비하는 ‘꿀팁’을 들려주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남들이 다 도전하는 분야보다는 잘 가지 않는 ‘블루오션’을 찾아보세요. 제가 판소리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또 제 좌우명이 ‘가슴 뛰는 삶을 살자’입니다. 항상 ‘불광불급’(不狂不及·미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의 자세로 역동적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보세요.”

대전 = 김창희 기자 chki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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