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37년 여름, 브래들리비치 민박집 바깥 마당에서 필립 로스가 아버지, 형과 함께 찍은 사진. 그때 아버지는 서른 여섯, 필립 로스는 세 살이었다. 문학동네제공

- 아버지의 유산 /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美 이민자 거리에서 생존하고
‘가장 훌륭한 시민’이 된 유대인

“내가 물려받아야 할 유산은
당신 존재 자체임을 알았다”
뇌종양 선고받은 아버지와의
이별 여행 기록한 문학 巨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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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일곱 살, 필립 로스의 아버지는 뇌종양 선고를 받는다. 얼굴 반쪽이 마비된 채 일그러진 후다. 그로부터 일곱 해 전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경우와 달리,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한 번은 치러야 할 기나긴 이별 여행의 시작이었다.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미국 현대문학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종류의 운명에는 예외가 없다.

비극은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을 택하더라도 좋은 일은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다운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령, 이 종양을 제거하려면 열 시간 이상 걸리는 위험한 수술을 치르는 수밖에 없다. 수술 중 사망할 수도 있고, 수술을 마친 후에도 예전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낮은 게 문제다. 그렇다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일단 존재를 드러낸 종양이 급속히 퍼져나가 생명을 단축할 게 틀림없다. ‘아버지의 유산’은 이러한 상황을 맞이한 작가가 아버지 허먼 로스를 죽음의 손에 맡길 때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기록해 간 깊은 애도의 기록이자 평범한 아버지의 영웅적 인생에 들려주는 슬픔의 찬가다.

“나는 아버지를 태우고 다니고, 아버지하고 함께 앉아, 아버지하고 함께 밥을 먹어. 아버지가 평생 해낸, 유대인 한 세대 전체가 해낸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일이 그분들을 미국인으로 만들어갔다는 생각을 해. ‘가장 훌륭한’ 시민으로.”

고향이란 무엇인가. 한 생명이 생존하는 데 가장 적합한 니치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미국은 고향 없는 존재로 이루어진 국가. 필립 로스는 아버지의 삶의 태도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생존자의 태도, 생존자 정신, 생존자주의.” 이야말로 이민자들의 제국인 미국의 내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쩔 수 없어서 고향을 떠난 자들이 마음속에 품을 수밖에 없는 생물적 감각. 낯선 땅에서 새로운 고향(유럽, 아일랜드, 한국, 남미, 인도, 중국 등)을 이룩하려고 지독할 정도로 강인하게 분투하는 것, ‘생존 감각’이야말로 미국의(특히 이민 첫 세대의) 본능이자 미국인들이 찬양해 마지않는 ‘가장 훌륭한 시민’의 진정한 정체다. 뉴어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부심 넘치는’ 니치 생성자.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이 이민자 거리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오. 나는 한 번도 굴복한 적이 없고,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고, 한 번도 용기를 잃거나 ‘포기하겠다’고 말한 적이 없소. 나는 충실한 남편, 충성스러운 미국인, 당당한 유대인이었고, 두 훌륭한 아들에게 나는 가져본 적이 없는 모든 기회를 주었소.”

어떠한 경우에도 고향을 버릴 때처럼 최악은 아니라는 긍정성, 절망적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낙관주의,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대비가 되어 있는” 현실주의,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이러한 자부로부터 나왔다.

하지만 그 자부가 이룩한 삶의 세부에는 아무런 다정함이나 어떠한 우아함도 있을 수 없다. 허먼은 삶이 ‘제대로’ 존재하기를 갈망하지만, 그 ‘제대로’는 실용만을 우선시하는 강박적 완고함과 때로는 인간성 자체를 위협하는 무감정의 엄격함으로 이루어진다. 가족들 각각의 개별적 인생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는, 애지중지하는 자식들을 어쩔 수 없는 반항아로 만들고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이혼을 떠올릴 만큼 처절하고 절실한 인생 감각.

‘아버지의 유산’을 읽는 내내,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생을 함께 떠올리면서, 때때로 소매의 운동이 눈가를 가로지르는 깊은 격통을 겪었다. 완고하고 격정적이지만 속정이 느껴지는 허먼 로스는, 어딘지 모르게 내 아버지를, 아니 한국전쟁 이후 생존의 아수라장을 뚫고 현대라는 새로운 둥지를 마련하려 했던 모든 아버지를 닮아 있다.

언젠가 나는 아버지한테, 이렇게 지독히 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했다가, 슬픔에 가득 찼을 불호령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나는 그 말을 후회한다. “아무것도 이해 못하겠어.” 이 지극히 겸손한 문장이야말로 아버지를 대할 때, 우리가 품어야 할 황금률이다. 필립 로스는 말한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와 내가 연결된 방식이 얼마나 깊고 또 깊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인생은 때때로 회한의 형식으로만 신비를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닫는다. 아아, 나는 늦었다. 당신은 부디 늦지 않기를.

필립 로스는 성인이 된 후 서먹해진 두 사람의 “통렬한 심연” 사이에 기억의 평균대를 놓고 비통함과 고상함이 어우러진 언어의 춤을 한없이 연기한다. 화장실 벽에 똥칠을 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생산하려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물려받아야 할 ‘진정한 유산’이 ‘아버지의 똥’, 즉 아버지의 존재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버지 허먼은 이민자의 일생을 다해 뉴어크 전체를 친숙한 곳으로 만듦으로써 ‘뉴어크의 시인’이 되었다. 필립 로스는 아버지의 일생을 자신의 것으로 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아버지의 시인’이 되었다. 284쪽, 1만38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순천향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