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더기 증인신청 경제계 ‘우려’

작년 150여명 불러 호통·망신
“막말 기본 소명기회조차 없어”
‘재벌개혁’ 내세워 기업 감사
올해 역대 최대 소환 가능성

무분별 소환 막는 법률개정안
3년 넘게 국회서 표류하는 중

경제산업계에 ‘국정감사 비상’이 걸렸다. 국회가 오는 10월 12일 국감 시작에 앞서 ‘적폐 청산’ ‘재벌 개혁’ 등을 앞세워 기업 총수나 경영진을 무더기로 증인 신청하는 ‘기업 군기 잡기’가 올해도 어김없이 재연되고 있어서다. 특히 사상 최대 규모로 기업인을 국감 증인으로 부를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커서 행정부 대상의 국감이 ‘기업 감사’로 변질됐다는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28일 산업계 및 국회에 따르면 국회 정무위원회·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환경노동위원회 등에는 주요 기업 총수와 경영진에 대한 증인(참고인) 신청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 상임위 여야 간사는 대부분 이날까지 최종 취합해 명단을 확정할 예정이다. 앞서 산자중기위는 27일 간사협의를 통해 이병선 카카오 부사장·이갑수 체인스토어협회장(이마트 대표)·하석주 롯데건설 대표·김연철 ㈜한화 대표·윤동준 포스코에너지 대표·나지용 두산중공업 부회장·조민수 코스트코코리아 대표·강남훈 홈앤쇼핑 대표 등을 증인과 참고인으로 정했다. 정무위의 야당 측 관계자는 “(기업 감사로 변질될 우려에 대해 )집권당이 되레 기업인 증인 채택에 열을 올리기 때문”이라며 “될 수 있으면 총수는 부르지 말고 기업인 채택을 최소화해 달라고 요구 중”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A기업 관계자는 “정무위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관련 기업 총수나 경영진을 부르려고 한다”며 “상임위 여기저기에서 증인을 신청하는 의원이 있어 도대체 몇 개 상임위에서 부를지 가늠이 안 된다”고 말했다. 국감의 기업인 증인 채택 규모는 지난해(20대 국회) 150여 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 16대 국회(58명)의 3배에 육박했다.

벌써 ‘군기 잡기’식 국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을’도 이런 ‘을’이 없다”는 푸념도 나온다. B기업 관계자는 “CEO가 온종일 국감장에 앉아 있다가 엉뚱한 질문에 호통만 듣고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라면서 “막말을 듣는 것은 기본이고 답변이나 소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C기업 관계자는 “세계 시장을 무대로 뛰어야 하는 CEO는 보통 한두 달 일정이 꽉 차 있는데, 불과 2주 전에 통보되는 국감 출석 요구로 주요 출장이나 미팅 등을 다급하게 취소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며 “수십 명의 핵심 인력까지 달라붙어야 해 기업의 주요 의사 결정은 ‘올스톱’ 상태나 다름없다”고 털어놨다.

CEO의 증인 채택을 막기 위해 해당 의원의 민원성 요구를 들어주는 일이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10월은 기업인이 내년 경영 전략 수립을 위해 바쁘게 뛰어야 하는 중대한 시기”라면서 “국회가 무작정 경영진을 부른 뒤 현장 책임자나 알 수 있는 질문을 하는 것은 ‘코미디’”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어 “사안의 본질에 맞게 현업에서 책임지고 답변할 적임자를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행태의 국감은 한국이 유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국·프랑스·일본 등은 의회의 국정조사권을 보장하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정기 형태는 없다. 미국은 엄격한 삼권분립 적용으로 국회의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감독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분별한 증인 신청을 막기 위한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일부 개정법률안’ 2건이 발의됐으나 3년 넘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개정안들은 증인 출석을 요구할 때 신문 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증인과 참고인도 사전 답변서를 제출해 해당 답변이 충분할 경우 출석 요구를 철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 증인이 안건 및 국감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어야만 신청할 수 있도록 해 무분별한 증인 출석 요구를 제한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이관범·권도경·유현진 기자 frog72@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