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박건규 대표가 지난 8일 경기 안산시 ㈜유래코 본사 2층에서 딸 인비의 우승 트로피 등 기념품을 소개하고 있다.

박인비의 아버지 박건규 ㈜유래코 대표

‘골프여제’ 박인비의 아버지 박건규(57) ㈜유래코 대표는 요즘 마음이 불편하다. 딸이 아직 우승하지 못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에비앙챔피언십 출전을 부상 때문에 포기했기 때문이다. LPGA투어 4대 메이저대회와 2016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골든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자랑스러운 딸.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 메이저대회 마지막 퍼즐을 올해에도 맞추지 못해 안타깝다.

지난 8일 박 대표를 경기 안산시에 있는 페트병 용기 포장재를 생산하는 유래코 본사에서 만났다. 박 대표의 안내로 건물로 들어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부터 벽면까지 모두 딸과 관련된 신문기사와 트로피, 모자 등 ‘기념품’이 가득 찼다. 박 대표는 “이 기념품들은 훗날 ‘박인비 골프 박물관’을 채워줄 소중한 딸의 재산”이라고 말했다.

유래코는 박 대표 부친이 1969년 경기 시흥시에서 창업한 페트병 병뚜껑과 포장재 제조회사다. 48년 된 기업이다. 1990년 10월 시화공단이 들어서면서 이사 온 이래 이곳에서만 27년째 작업하고 있다. 그동안 생산 설비가 늘어나면서 포화 상태가 돼 확장 이전을 검토해오다, 얼마 전 대구에 제2공장을 새로 조성했다. 박 대표는 1990년 중반부터 부친 대신 경영을 맡아오고 있다. 이젠 큰딸 인비가 이 회사 대주주가 됐다.

박 대표는 부친 박병준 회장의 권유로 20세 때 골프를 시작했다. 박 대표의 베스트 스코어는 3언더파 69타. 1996년 외환 외기 직전 3년 동안 골프에 빠져 있을 때 작성했다. 경기 용인시의 플라자 골프장 라이온 코스였다. 당시 1주일에 3∼4회 필드에 나갔다. 일찌감치 싱글 핸디캐퍼로 이름을 날렸던 박 대표가 이븐파나 1∼2언더파를 유지하던 때였다. 박 대표는 홀인원은 한 번도 못했지만, 이글은 10여 차례가 넘는다.

생애 최고의 골프 스코어를 남기고 온 날, 박 대표는 아내 김성자 씨에게 “인비를 골프 선수로 키워볼까”라고 넌지시 물었다. 아내도 딸을 임신한 몸으로 골프를 접했던 터라 쉽게 의견일치를 봤다. 딸도 골프가 싫지는 않았던지 이내 골프에 빠져들었다. 1997년 초등학교 3학년이던 인비가 골프를 시작하면서 가족의 전폭적인 지원이 전개됐다. 초등학생 혼자선 라운드가 불가능해 가족이 함께 나섰던 것. 딸 인비와 할아버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까지 3대가 함께했다. 주니어대회가 열린 플라자 골프장, 한원 골프장, 관악(현 리베라) 골프장을 자주 다녔다.

하지만 박 대표는 ‘골프 대디’가 된 후 점차 골프에 흥미를 잃었다. 다른 집 딸의 골프 솜씨가 눈에 들어왔고, 딸에게 유명한 코치를 붙여주고 싶은 마음에 딸의 기량 향상을 위한 방안을 찾느라 바빴다. 박 대표는 필드에서 언더파를 남겨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온 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풀이 죽어 있는 딸을 보면 무척 미안했다. 그렇게 점차 골프에 흥미를 잃게 됐다. 딸이 대회에 참가하면 핑계를 댄 후 골프장에 나가지 않았고, 부득이 골프장에 가더라도 일부러 엉망으로 클럽을 휘둘렀다. 아버지의 정성 덕분인지 딸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첫 전지훈련을 떠났고 70대 타수까지 챙겼다. 6학년 때 10차례 출전해 우승 7차례, 준우승 3차례를 차지했을 만큼 성장이 빨랐다.

박 대표는 딸에게 골프를 시킨 지 20년이 흐른 지금 “딸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을 했다”고 자부한다. ‘잘 쳐도 걱정, 못 쳐도 걱정’인 게 부모의 마음. 박 대표는 “간혹 ‘딸에게 편히 공부나 시킬 걸, 고생시킨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한다”며 “딸이 골프를 하면서 마음 아팠던 적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박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딸이 대회에 나가면 힘든 주말을 보내야 했다. 술을 마시지 않고 일찍 집에 들어가 몸가짐을 가다듬고 딸을 응원하며 뜬눈으로 중계방송을 시청했고, 리더보드 판까지 만들어 딸과 경쟁하는 선수의 스코어를 점검했다.

박 대표는 “2008년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슬럼프에 빠졌을 때, 지난해 손가락 부상으로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출전을 놓고 고민할 때 딸이 가장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즌 초 손가락이 아팠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점차 샷에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불안해졌다. 의사를 찾아갔더니 무조건 쉬라고 권유했지만 출전을 강행했다. 올림픽 준비를 위해 인천 송도 잭 니클라우스 골프장에서 한 달 가까이 1주일에 4일씩 훈련했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출전권을 양보하라는 여론이 빗발쳤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의 한 고위 간부가 “박인비는 국가대표 경험이 없으니 경험 많은 다른 선수에게 올림픽 출전을 양보해야 한다”는 ‘막말’ 인터뷰까지 해 딸을 더욱 힘들게 했다. 딸의 올림픽 출전이 어려울 것처럼 돼가자 방송사에선 거액을 제시하면서 해설을 부탁해왔다. 올림픽이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로 출국하기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한 딸은 아버지에게 “(올림픽에)가도 될까”라고 몇 차례나 물었다. 박 대표는 부모로서는 속상했지만 인천공항에서 딸을 배웅하며 참가하는 데 의의를 두고 몸 성히 다녀오라는 말만 건넸다.

박 대표는 몇 해 전부터 골프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2013년 한 해에 LPGA투어에서 6승을 거뒀고,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받았다. 간혹 딸의 요청으로 라운드를 함께 나가더라도 3홀 정도 마치면 딸에게 “하나 더 쳐봐”라고 권유하는 등 딸을 최우선으로 챙긴다. 박 대표는 “가끔 지인들과 라운드하지만 예전처럼 언더파 기량을 발휘할 순 없다”면서 “(내가) 골프를 하는 것보다 (딸이 출전한) 대회를 지켜보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딸은 올림픽에 한 번 더 출전하고 아이를 가질 계획인 것 같다”면서 “딸이 언젠가는 은퇴할 것이고, 은퇴할 때는 무척 섭섭할 것 같다”고 전했다.

안산 = 글·사진 최명식 기자 mschoi@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