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1966년 MBC 성우로 데뷔한 변희봉은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오가며 구수한 연기를 선보여왔다. 왼쪽부터 영화 ‘내시’ ‘살인의 추억’ ‘괴물’.

- 칸에서 빛난 원로배우 변희봉

“레드카펫 그렇게 긴지 몰랐다
연기도 인생도 이제 저무는데
미래 열린 것 같은 희망 생겨”

‘옥자’조연… 짧지만 인간미 넘쳐
봉준호 “영화 4편 선생님께 의지
파도 파도 뭔가가 계속 나와”

“기대해주세요. 죽는 날까지 열심히 할랍니다.” 원로배우 변희봉(75)이 생애 처음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후 기쁨에 겨워하며 이같이 소감을 전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신작 ‘옥자’가 제70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르며 출연배우들과 함께 프랑스 칸을 찾았다. 이 영화는 지난 19일(현지시간) 2300여 석 규모의 뤼미에르극장에서 공식 상영회를 열었다. 상영 전 틸다 스윈턴, 제이크 질런홀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레드카펫을 걷는 그에게 세계 각국 사진기자들이 플래시 세례를 보냈다. 그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답하며 여유 있게 극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음 날 현지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난 그는 “레드카펫이 그렇게 긴지 몰랐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며 온갖 망상이 왔다 갔다 했다”며 “뭔가 소원을 이룬 듯하다. ‘이것이 행복인가’ 만감이 교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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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는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거대 돼지 옥자가 강원도 산골 소녀 미자(안서현)와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를 담았다. 변희봉은 이 영화에서 부모를 잃고 홀로 된 손녀 미자와 함께 옥자를 키우며 살아가는 주희봉 역을 맡았다.

주희봉은 다 큰 손녀가 돼지와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 옥자를 미국 회사로 보낸 후 미자가 옥자를 찾아 떠나려 하자 안타까운 마음으로 미자를 만류한다. 미자가 저금통을 깨 여비를 가져가려 하자 방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발버둥 치며 밀치는 장면에서 변희봉 특유의 인간미가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 그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영화가 지닌 따뜻한 정서를 대변해주는 연기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1966년 MBC 공채 2기 성우로 데뷔한 그는 안방극장과 스크린을 오가며 자연스럽고 구수한 연기를 선보여왔다. 1970∼1980년대 큰 인기를 모은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사이비 교주 역을 맡았으며, 영화 ‘살인의 추억’(2003년)에서는 어수룩한 시골 형사반장을 연기하기도 했다. 또 영화 ‘괴물’(2006년)에서는 손녀를 잃고 애끓는 할아버지를 절절하게 표현해냈으며 드라마 ‘하얀거탑’(2007년)에서는 대쪽 같은 의사 역을 맡아 작품의 무게 중심을 잡아줬다.

그에게 “외국 사진기자들이 ‘아시아에도 저렇게 멋진 노배우가 있었나’하는 생각을 했을 것 같다”고 말하자 “이제 다 저물었는데 ‘뭔가 미래의 문이 열리는 것 아니냐’하는 기대감도 생겼고, 힘과 용기가 불끈 솟아올랐다”며 “배우 생활을 오래 했지만 칸영화제에 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다. 마치 70도 기운 고목에 꽃이 핀 느낌”이라고 답하며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20여 명의 한국 기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고, 그의 눈이 촉촉이 젖었다.

그는 또 600억 원에 달하는 ‘옥자’의 제작비 전액을 투자한 넷플릭스와 할리우드 제작사 플랜B에도 감사 인사를 전하려다가 넷플릭스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며 “여러 번 들어도 잘 모르겠다”고 말해 큰 웃음을 자아냈다.

‘플란다스의 개’(2000년)를 시작으로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까지 봉 감독의 작품에 4번 출연한 그는 “봉 감독이 나를 왜 썼는지 그 속에 안 들어가 봐서 진실을 알 길이 없다”며 “일을 하면서 봉 감독 손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연기를 했다. 배우는 그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옆자리에 있던 봉 감독은 이에 대해 “초등학교 1학년 때 변 선생님이 나오신 사극을 보고 대사를 줄줄이 외웠다. 4편의 영화를 선생님에게 의지해서 해왔다”며 “반복적으로 함께 일하는 이유는 파도 파도 계속 나오는 뭔가가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궁금하다”고 극찬했다.

김구철 기자 kcki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