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플로렌티노 페레즈(왼쪽) 레알 마드리드 회장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페레즈 회장은 유럽 슈퍼리그 출범에 가장 적극적이다. AP 연합뉴스

세페린 ‘입김’에 유럽축구계 ‘戰雲’

유럽축구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지난해 9월 알렉산더 세페린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이 선출되면서부터 ‘마찰음’이 발생하고 있다. 세페린 회장은 미셸 플라티니 전 회장의 잔여 임기를 이어받아 2019년 3월까지 UEFA의 수장을 맡게 된다. 플라티니 전 회장은 제프 블라터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의 수상한 돈거래로 인해 4년간의 자격 정지를 받고 물러났다. 세페린 회장은 선거에서 미카엘 판 프라흐 네덜란드축구협회장 겸 UEFA 부회장과 맞붙어 승자가 됐다. 열세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세페린 회장은 투표에서 42-13이란 압승을 거뒀다. 세페린 회장의 선출은 이변 중의 이변으로 꼽힌다. 세페린 회장은 축구변방 슬로베니아 출신이기에 출마 선언 시 눈길을 끌지 못했기 때문. 그러나 세페린 회장은 틈새를 파고드는 전략으로 UEFA의 수장이 됐다.

그는 빅리그, 빅클럽이 아닌 55개 UEFA 가맹 협회, 중소리그, 중소클럽을 위해 일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어 동유럽 등 축구 약소국의 표심을 장악했다. 1954년 UEFA가 창설된 이후 동유럽에서 회장이 배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변호사 출신으로 올해 49세인 세페린 회장의 등장은 UEFA 내에서 기존 질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됐고,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걸 의미한다. 특히 소수 빅리그, 빅클럽의 독점·독주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세페린 회장의 당선에 밑거름이 된 것으로 풀이된다.

유럽축구는 세계 최강이다. 하지만 유럽의 프로축구단, 리그 사이에서 ‘빈부 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가 이른바 빅3로 군림하고 독일의 분데스리가까지 4대 리그가 유럽축구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유능한 선수를 끌어모으는 싹쓸이로 인해 소수의 빅클럽은 엄청난 이익을 남기고 인기를 누린다.

지난해 11월 영국 스포츠 전문 매체 스포팅인텔리전스가 전 세계 7개 종목 17개 리그 333개 팀의 연봉을 분석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시즌 축구리그 중 평균 연봉이 가장 높은 건 프리미어리그(평균 연봉 321만8523달러·약 35억8000만 원)였다. 2위는 프리메라리가(163만5869달러), 3위는 세리에A(145만9436달러), 4위는 분데스리가(137만2610달러), 5위는 프랑스리그1(96만1638달러)이었다. 유럽에서 프랑스리그1 다음으로 높은 스코틀랜드리그는 평균연봉이 19만3907달러에 그쳤다.

스포팅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축구단 평균연봉 톱 30은 프리미어리그 15개, 프리메라리가와 세리에A 5개씩, 분데스리가 4개, 그리고 프랑스리그1의 1개 팀으로 구성됐다. 구단별로는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평균연봉 761만6400달러로 1위, 프리메라리가의 바르셀로나가 745만6800달러로 2위, 프리미어리그의 맨체스터시티가 715만8462달러로 3위,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가 666만8475달러로 4위였다.

반면 그 외 다수의 유럽리그는 들러리로 전락했다. UEFA 챔피언스리그가 좋은 예다. 지난 시즌까지 최근 11차례의 챔피언스리그에서 스페인이 6차례, 잉글랜드와 이탈리아가 2차례씩, 그리고 독일이 1차례 우승했다. 이른바 ‘빅3’가 11시즌 중 10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스페인에선 FC 바르셀로나가 4차례, 레알 마드리드가 2차례 우승했다. 올 시즌에도 마찬가지가 될 것으로 점쳐진다. 다음 달 12일 시작되는 8강전에 스페인은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까지 3개 팀이 진출했다. 그리고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 잉글랜드의 레스터시티, 이탈리아의 유벤투스, 프랑스의 AS모나코가 8강에 합류했다.

세페린 회장은 대형, 중소형 클럽 사이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겠다고 공언했다. 세페린 회장은 지난 23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UEFA 정기회의에서 “빅클럽이 세계 최고의 선수들을 독점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이적 시스템을 손보겠다”고 강조했다.

세페린 회장은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미국프로농구(NBA) 등에서 실시하는 사치세 부과를 적극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메이저리그는 지난해 기준으로 선수단 연봉총액이 1억8900만 달러(약 2119억 원)를 넘으면 사치세를 물도록 하고 있다. 세페린 회장은 또 선수단 규모 축소, 엄격한 이적 규정 적용 등도 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세페린 회장은 또 UEFA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소리그, 중소클럽에 지원금을 배분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UEFA는 2011년 재정적 페어플레이룰을 도입했다. 수익 내에서 지출을 허용하는 제도다. 그런데 재정적 페어플레이룰은 오히려 빈익빈 부익부를 고착화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수익을 많이 거두는 구단은 거액의 이적료, 연봉 등을 지급하고 스타를 영입할 수 있는 반면 수익이 적은 구단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페린 회장이 사치세 도입 등을 검토하는 건 재정적 페어플레이룰의 허점을 보완하고, 스타 싹쓸이를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도로 분석된다.

세페린 회장은 또 빅클럽들이 추진하고 있는 유럽 슈퍼리그 출범 움직임에도 제동을 걸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이상 스페인), 첼시, 맨체스터시티(이상 잉글랜드), 유벤투스, AC 밀란(이상 이탈리아), 바이에른 뮌헨(독일), 파리 생제르맹(프랑스) 등 명문구단들이 슈퍼리그 창설에 적극적인 것으로 전해졌다. 유럽 최상위 클럽들만 출전하는 리그를 출범시켜 팬들에게 가장 수준 높은 경기력을 제공하자는 취지. 물론 엄청난 후원, 광고료, 중계권료를 챙길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세페린 회장은 그러나 “내가 UEFA 회장으로 있는 한 유럽 슈퍼리그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며 “슈퍼리그 운운하는 건 UEFA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세페린 회장은 빈익빈 부익부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며 회장 선거 운동 과정에서 유럽 슈퍼리그 반대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 그런데 UEFA는 회장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챔피언스리그 본선 출전 자격을 변경했다. 2018∼2019시즌부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A 등 4대 빅리그 상위 4개 팀이 챔피언스리그 본선에 직행하도록 규정을 바꿨다. 지금까지는 프리메라리가, 프리미어리그, 분데스리가는 상위 3개 팀이 본선에 출전하고 4위 팀은 플레이오프를 거쳤다. 세리에A의 3위 또한 곧바로 본선에 참가할 수 없다. 유럽 최고 리그의 명문구단이 많이 참가할수록 양질의 경기력이 발휘되고, 이에 따라 챔피언스리그 중계권료가 인상되는 등 수익이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출전 자격을 변경했다. 하지만 세페린 회장은 이를 슈퍼리그 출범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인식하고 있고, 이에 따라 출전 자격을 재변경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 달 6일부터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열리는 UEFA 회의에서 세페린 회장은 빅클럽들의 독점·독주를 제어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빅클럽, 빅리그들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인다. 월드스타 영입은 성적과 인기는 물론 구단 수입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치세 도입은 구단 재정에 부담이 되고, 선수단 규모 축소는 클럽의 덩치를 줄이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빅리그, 빅클럽과 세페린 회장의 힘겨루기가 다음 달 초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손우성 기자 applep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