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크래쉬배기지의 찌그러진 여행용 캐리어

새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가면 늘 “신고식 하자”며 달려드는 아이들이 있다. 피한다고 피해도, 등굣길에 반짝반짝하던 신발은 결국 너저분해져서 집에 돌아온다.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그래도 ‘등짝 안 맞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는데, 그건 언제나 다섯 살 터울인 오빠 몫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오빠는 청바지를 새로 사기만 하면 표백제를 뿌려 물을 빼거나, 칼로 북북 찢어 놓곤 했다. 분노 조절 장애가 아니라, 유행이었기 때문이다. 운동화를 사수하던 아이들도 이내 큰 흐름에 ‘발’을 맡겼다. 어제 산 게 아니라, 어제도 신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약간 때가 탄 신발이 멋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중반의 일이니 벌써 20년이 넘었다.

돌고 도는 게 유행이라더니, 옷이 정말 그렇다. 그때 그 ‘그런지 룩’이 다시 인기다. 멀쩡한 옷과 신발을 부러 망가트렸던 일화를 패션사에 한 획을 그은 스타일 범주에 넣으려니 좀 찔린다. 그런지는 록 음악의 한 장르로 여러 가지가 넝마(그런지)처럼 섞인 자유로운 사운드를 추구한다. 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옷을 해지고 낡게 입어 온몸으로 ‘자유’를 표현한 게 그런지 룩이다. 이를 대중화한 밴드가 너바나라는 것도 유명하다.

요즘엔 표백제 뿌리고, 칼 들고 설치다가 야단맞을 일은 없다. 수없이 빤 것처럼 은근하게 색이 바래져 출시되는 청바지가 널렸고, 찢어진 청바지가 쇼윈도마다 걸려 있으니까. 총 맞은 것처럼 송송 뚫린 것도 있고, 구멍 위치나 낡고 해진 정도까지 다양해서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이쯤 되면 그런지 룩이란 표현은 박물관에 가야 할 것 같다. 과거에서 건져 올린 새로운 아이템은 디스트로이드(destroyed·파괴된) 패션, 대미지(damaged·손상된) 진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바지뿐일까. 한 이탈리아 브랜드에선 아예 찌그러진 여행 가방을 선보였다. 신경 써서 다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우니, 그런지 룩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도 같다. 이러한 21세기식 그런지 스타일은 ‘오래됐으나 멋스러운’ 빈티지 열풍을 만나 상승 작용을 일으켰고, 옷뿐 아니라 가구와 음식 등 라이프 스타일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최근엔 트렌드세터 지인으로부터 스마트폰 액정을 일부러 부숴주는 데가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를 들었다. 거미줄처럼 예쁘게 모양을 내서 깨트리고, 파편에 손이 베이지 않도록 보호 필름으로 잘 마무리해 준다는 거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목적이 뭐냐 물었더니, 지인은 “멋이지, 파격이고”라고 한다. 손이 어줍은 것인지, 천성이 덜렁대는 것인지 서너 달에 한 번꼴로 액정을 교체하는 기자는 그 오묘한 가게에 한번 가볼까 한다. 전적으로 실용적인 이유다.

pdm@munhwa.com

이미지 크게보기 게스의 ‘수지 데님’

이미지 크게보기 유니클로의 ‘데미지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