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조선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 정세권이 양반들이 아닌 소시민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조성한 북촌 한옥지구. 작은 크기에 서로서로 지붕을 맞댄 방식이다. 자료사진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 김경민 지음 / 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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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북촌에 간다. 군데군데 포진한 유명한 맛집을 찾아가기 위함인데, 주린 배를 채우면 그제야 작은 한옥들이 연출하는 고즈넉한 분위기로 시선이 옮아간다. 한옥을 사이에 두고 이어진 작은 골목은 없던 추억마저 상념 하게 하니 좋다. 이제는 외국 관광객들도 환호하는 공간이지만, 한때 북촌·인사동·성북동 등의 개량한옥을 두고 논쟁이 만만찮았다. 개량한옥은 대개 1920∼1930년대 지어졌는데, 고유의 가치를 담은 전통한옥이 아닌 이상 보존 가치가 있느냐는 논쟁이었다. 하지만 북촌을 위시한 서울 전역에 생긴 개량한옥이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는지 알면 그 논쟁은 무의미할 터. 개량한옥이 품은 사연을 담은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가 오늘 함께 읽어볼 책이다.

많은 사람이 북촌에 열광하지만, 정작 누가 이런 동네를 만들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북촌만이 아니라 인근의 인사동·혜화동·성북동의 작은 한옥들, 그리고 종로3가 뒤편의 익선동, 종묘 옆 봉익동 등 2000년대부터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 아담한 동네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20세기 초 한 명의 선각자와 그가 설립한 회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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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들어 일본인들의 경성 이주가 증가했고, 계획적으로 북촌 일대를 잠식했다. 조선인들의 주거 공간은 위협받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건양사’라는 건축회사를 운영했던 정세권이 기획하고 실행한 한옥집단지구 개발이었다. 정세권은 양반네들이 아닌 소시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한옥을 구상했고 ‘작은 크기에 서로서로 지붕을 맞대는’ 방식으로 개량한옥을 북촌 등지에 대량으로 지었다. 저자 김경민 서울대 환경대학원 도시계획 전공교수는 이런 정세권을 일러 “토지를 매입해 대단위 부동산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행하며 도시 개발과 주택 공급을 담당한 조선 최초의 부동산 디벨로퍼”라고 명명했다.

부동산 디벨로퍼라고 해서 정세권이 자신의 이익이나 막대한 이권을 취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조선인의 주거지를 확보하고 조선인의 주거문화를 일대 개혁”하기 위해 애썼던 민족자본가였다. 심지어 정세권은 본인이 건설한 한옥의 품질을 검수하기 위해 한 지역에 한옥집단지구를 개발하면 온 가족이 이사해 한 집에서 일정 기간 거주했다. 하자가 발생하면 고쳤고, 그렇게 한옥의 품질을 유지했다. 북촌 등의 개량한옥이 시간의 더께를 머금으며 오늘에 이른 것은 정세권의 이 같은 정신 덕분인 셈이다.

1920년대 북촌 개량한옥 건축도 그랬지만, 1930년대 사대문 외곽, 즉 창신동·서대문·성북동 등을 개발할 때도, 1940년대 왕십리·행당동 지역을 개발할 때도 정세권은 일본 자본을 견제했다. 1930년대부터 일본은 사대문 밖 지역, 특히 농지 등 빈터를 사들여 이른바 뉴타운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왕십리와 행당동 일대도 그렇게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개발계획을 간파한 정세권은 이 일대의 토지가 매물로 나오면 적극 매입하는 것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이미 북촌은 정세권의 개발로 조선인들의 차지가 된 마당에, 일본은 왕십리·행당동·보문동 일대를 개발함으로써 조선인 거주지를 포위하는 형국을 만들고자 했다. 경제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빈곤한 조선인들은 경성에서 더 먼 지역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으니 일석이조라고 판단한 것이다. 조선인 주거단지의 분절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저자는 “정세권과 동양척식회사의 ‘왕십리 토지 전쟁’은 도시계획·개발사적 의미가 상당하다”고 평가한다.

정세권은 부동산 개발로 자수성가했지만, 당대 부자들이 일본에 부역한 것과는 달리 철저히 민족자본가였다. 그는 신간회 후원에 앞장섰고,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열심이었다. 본인 건물에 조선물산장려회 사무실과 상점을 개설할 정도였다. 조선어학회에 회관과 토지를 기증했고 ‘조선어사전’ 발간에도 재정을 아끼지 않았다. 정세권은 돈을 왜 벌어야 하는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당시 부자들은 물론 요즘 재벌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부동산 개발에서도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던 정세권이 다양한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걸 일본이 봐줄 리 만무했다. 안재홍, 이극로와 함께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돼 모진 고문을 당한 정세권은 대부분의 재산을 빼앗기면서 사업마저 쇠퇴했다. 6·25전쟁 후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로 낙향한 그는 자급자족적 주거 환경이 가능한지 실험하며 말년을 보냈다. 회사를 협동조합식으로 운영하며 주택공동체를 조합식으로 만들려던 오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정세권은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세권은 “서구의 도시이론가에 필적할 만한, 경성을 바꾼 도시계획이론가이자 실천가”였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는 우리 삶의 터전이 어떤 연유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다. 한때 유행하는 말로 “뭣이 중헌디”를 알았던 정세권의 이름이 북촌을 거니는 모든 사람에게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