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22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맹호 민음사 회장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맹호 민음사 회장 별세

이미지 크게보기 박맹호 회장은 문화일보와의 인터뷰 때마다 책 사랑을 역설했다. 곽성호 기자 tray92@

“그는 계절 없는 산타클로스였다. 이 땅에서 문학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 중에 그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던 이가 없다.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간 산타클로스, 계절 없는 산타클로스였다. 그렇게 기억되는 사람이다.”

22일 84세 나이로 타계한 박맹호 민음사 회장에 대해 서울대 문리대 동기로 평생의 친구였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렇게 추모했다. 1966년 5월 서울 종로구 청진동 비좁은 옥탑방 사무실에서 ‘민음사’를 만든 후 50년 동안 한국 문학의 토대를 만들고, 선진 학문과 인문학을 수입해 목마른 지식·교양 사회에 물길을 터주고, 한국 단행본의 앞선 전범을 만든 고인을 추모하는 이들의 조문 행렬은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날 오전까지 소설가 이문열, 성석제, 하일지, 문학평론가 김병익, 정과리, 시인 정현종, 신달자, 문정희 씨와 시인인 도종환 의원, 고인과 대학 동창으로 절친했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송영석 해냄 출판사 사장 등 출판계 후배들이 빈소를 찾아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이 전 장관은 “그는 소설가를 하려다 문학 하는 사람을 도우려 출판을 했다”며 “큰 출판사를 내겠다는 뜻이 아니라 작게 시작해 기본을 다지고 글 쓰는 이들을 지원하며 출판사를 키우려 했다”고 기억했다. 실제로 1933년 충북 보은에서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으로 뽑혔지만 자유당 정권을 풍자한 내용 때문에 최종적으로 당선작이 되지 못한 일화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평소 “내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내 능력을 간파해 과감하게 소설가의 길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팔순을 기념해 펴낸 자서전 ‘책’에서도 “소설가의 길은 청산했지만 문학청년 시절은 민음사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됐다. 남들보다 먼저 훌륭한 작품을 만나면 좋았고,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했을 때의 희열은 직접 작품을 쓸 때보다 훨씬 크다”고 밝힌 바 있다.

민음사를 차릴 당시 의기투합한 뒤 평생 막역한 사이로 지내온 시인 고은은 “만나자마자 우린 거의 혈연화해 타자로 느끼지 못했다. 평생 늘 같이 밥 먹고, 같이 술 마시고, 같이 토론했다”고 회고한 뒤 “그는 한국 현대 출판계에서 낡은 사고 없이 나이 먹을수록 새로운 것을 추구한 이례적인 존재였다”고 말했다. 고 시인은 “한국의 1970, 1980년대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전 분야를 책을 통해 이끈 문학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도 했다. 고 시인의 말처럼 고인은 1973년 ‘세계 시인선’, 1974년 ‘오늘의 시인 총서’, 1978년 계간 ‘세계의 문학’과 ‘오늘의 작가상’을 통해 숱한 작가와 시인, 인문학자를 배출하며 늘 문학·출판의 첨단에 섰다.

1982년 ‘대설주의보’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그 뒤 민음사 주간으로 일했던 시인 최승호 씨도 “모든 것이 허공처럼 열려 있는, 고정관념이라곤 없는 첨단과 전위의 자리에서 출판을 했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한국 문단에서 특이하게 집단의식이 없었고, 개성을 존중했던 분”으로 추모했다. 고인은 1990년대 초 ‘전문 편집자 시대’를 열었고, 이후 비룡소, 황금가지, 사이언스북스 등 자회사를 통해 어린이 책, 대중 문학, 과학책 출판을 선도함으로써 전문 출판의 길도 제시했다.

문학평론가 김우창, 시인 고은, 소설가 최인훈과 함께 계간 ‘세계의 문학’ 초대 편집위원으로 함께했던 문학평론가 유종호 씨는 “세상이 다 아는, 출판계에서 가장 정열적이고 눈 밝고 독자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출판인이었다. 부단히 공부하고 자기 일에 골몰한 노력형이었다”며 “평생을 같이한 이로 애석하기 그지없다”고 추모했다.

고인은 자서전 ‘책’에서 “책이야말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문화의 진수이자 인간의 DNA이다. 책은 인생의 교과서이며 모든 발전의 디딤돌이다. 완성된 인간은 책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출판 종사자들은 이런 사명감을 갖고 꾸준히 책을 펴내 독자에게 접근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 변하지 않을 사실”이라는 그의 말은 후배들에게 주는 당부로 남게 됐다. 언제나 자신의 생은 책으로 쌓은 삶이라고 말했던 고인은 한 인터뷰에서 어떤 생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었다. “책을 사랑하다, 책을 만들다, 그리고 사라졌다. 이렇게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위은숙 씨와 박상희 비룡소 대표이사, 박근섭 민음사 대표이사, 박상준 사이언스북스 대표이사가 있다. 발인은 24일 오전 6시.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