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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록 경희대 공공대학원 교수·정치학

국회가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소추하고, 헌법재판소가 본격적인 탄핵 심리에 착수함으로써 ‘촛불’의 1차 염원은 이뤄졌다. 이제부터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 8차례에 걸친 촛불집회를 바라본 외국 언론들의 평가에 그 단서가 있다. 독일의 유력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는 ‘민주주의의 모범’이라고 평가하면서 한국의 수준 높은 시위와 민주주의를 유럽과 미국이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고라(광장) 민주주의가 유종의 미를 거둘지에 대해선 우려가 없지 않다. 대의(代議)민주주의를 감시·보완하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서는 촛불집회 피로감과 좌파, 빨갱이, 종북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면서 의미를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한 것처럼, ‘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임을 간파한 우리 국민은 이번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근대적 의미의 각성된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내용은 다르지만, 형식 면에서 1688~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과 1789년 프랑스의 시민혁명 사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순히 박 대통령의 탄핵 심판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권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이 한국 사회의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을 수용하지 않으면 분노한 프랑스의 시민들이 구체제(앙시앵레짐)를 전복했던 것처럼, 평화로운 촛불집회가 시민혁명으로 비화할 수도 있을 것이며, 시민들이 정치권력의 주체로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극화 문제는 급속히 악화하고 있다. 성냥불만 그으면 폭발할 기세다. 정치권이 각성하지 않으면 막을 수 없다.

한국 사회는 내용 면에서 민주주의를 더욱 발전시켜 질적으로 도약할 기회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정치권의 무능·부패·야합·분열 등으로 반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4·19 학생혁명 이후 5·16 쿠데타가,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이후엔 전두환의 국보위 체제가, 1987년 6·10 시민항쟁 이후 노태우의 군부정권 연장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사회는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이기에, 이번 촛불 집회 이후도 염려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 광장의 민심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한국 사회를 더는 용인해선 안 된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이미 맹자의 역성(易姓)혁명, 로크의 저항권, 링컨의 혁명론 등은 민주주의의 핵심 이론으로, 민의를 따르지 않는 권력은 전복돼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날 때까지는 박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반 집회가 헌재를 압박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 탄핵 사건은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과 상식, 비정상의 정상화 문제다. 검찰은 박 대통령과 그 일당을 중대한 범죄 피의자들로 발표했다. 보수와 친박이 의리와 패륜을 거론하면서 그들을 두둔하는 건 범죄자를 비호하는 것일 뿐, 보수가 지켜야 할 가치와는 무관한 것이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인 이석연 전 법제처장은 대통령을 탄핵할 사유가 너무나 명백하며, 헌재가 신속히 결론을 내지 않으면 저항권 행사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제 헌법재판관들은 국민의 인내심을 시험해서도 안 되며, 지체(遲滯)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며, 복스 포풀리 복스 데이(vox populi, vox dei), 즉 시민의 목소리는 신(神)의 목소리라는 라틴 속담을 명심해주길 바란다. 지금 우리는 세상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변혁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