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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 국제부장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가적 위기나 역사적 전환기를 어떻게 포착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일랜드처럼 국가적 재정위기를 경제 선진화 기회로 전환시키면 도약하지만, 베네수엘라나 브라질처럼 국가 위기 앞에서도 포퓰리즘에 집착하면 추락한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9일 국회에서 표결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박근혜 체제는 사실상 끝이 났다. 이제 그 이후 열릴 전대미문의 정치 공간을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 삼을 방법을 놓고 고민할 때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최순실 사건 분석 기사에서 “한국은 대략 20년 주기로 엄습한 위기를 국가적 발전 기회로 전환시키며 위기 대응 능력을 키워온 나라”라고 평가했다. 실제 우리나라는 1960년 4·19와 1961년 5·16 뒤 위기를 경제적 빈곤 극복 기회로 전환했고, 1979년 10·26 이후의 위기는 시장경제 체제를 강화하는 계기로 전환시켰다. 또 1997년 외환위기는 부채 의존 경제를 털어내는 전환점이 된 만큼 이번 탄핵 사태도 촛불의 에너지로 기존 정치판을 혁신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식민지 해방 직후 우리나라는 파키스탄이나 가나 수준이었지만 역사의 위기 국면을 도약의 받침대로 활용한 덕분에 아시아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의 회고록 ‘빙하는 움직인다’에는 ‘바람의 문’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싱가포르 근무 시절 윈드서핑을 배우던 그는 매년 9월 말 인도네시아 바탐섬 해협을 건너가기에 적합한 바람의 문이 잠시 열린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문이 열렸을 땐 싱가포르에서 해협을 건너 바탐섬까지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진입이 힘들다는 것이다. 국가적 현안도 역사의 문이 열릴 때 기회를 잡아야 한다. 송 전 장관은 그런 사례로 북핵 문제를 들었다. 북핵 해법의 문은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0년 페리 프로세스, 그리고 2005년 9·19 공동성명 합의 때 등 세 번 열렸다.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은 최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가 몇 달 더 지속됐다면 해결 수순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렇지만 미국 대선에서 정권 교체가 이뤄졌고, 2005년의 모멘텀은 방코델타아시아(BDA) 갈등 속에서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면서 실기(失機)했으며, 그 뒤 위기가 이어졌다. 물론 북핵 문제의 본질을 송 전 장관과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는 박 대통령에게는 개인적 불행이고, 국가적으로도 심대한 타격이지만 관점을 달리해 보면 ‘87체제’의 적폐를 쓸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국회의 탄핵안 가결 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반년 정도를 얼마나 창조적으로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직선제 개헌으로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가 시행된 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정부에서는 친인척·측근 비리가 반복됐다. 현 정부에서는 최순실 일가의 국정 관여에 주술 의혹까지 추가되면서 87체제에 내재된 모순이 더 격렬하게 폭발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다 해도 헌법이 바뀌지 않는 한 유사 사태가 반복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번 탄핵을 계기로 5년 단임의 제왕적 대통령제만큼은 고쳐야 한다.

개헌 문제는 노무현정부 이래 늘 제기됐지만 정치적 합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 현직 대통령은 임기 축소를 원치 않고, 차기 유력주자 또한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개헌론에 대해 “거대한 들불이 일고 있는데, 곁불을 쬐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보자는 계산”이라며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의 임기가 단축되는 이 국면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줄이고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맞추는 4년 중임 원포인트 개헌만이라도 실행할 좋은 기회다. ‘들불’을 활용해 다른 창조적 작업을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한 민족이다. 박 대통령 탄핵 이후 국면은 개헌을 통한 체제 업그레이드의 문이 열리는 귀한 시기다. 정치공학적 접근을 떠나 수십 년 유효할 국가 시스템을 재설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바람의 문, 역사의 문은 자주 열리지 않는다. 박 대통령 탄핵 공간을 활용해 1987년에 만들어진 헌법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은 현세대에 주어진 역사적 명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