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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동 사회부 차장

박근혜 대통령이 정계에 입문한 1998년 4월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 때부터 가까이에서 취재하면서 한 가지 의구심이 있었다. 그가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갈등 끝에 탈당해 2002년 창당한 한국미래연합과 2004∼2006년 한나라당의 대표를 지낼 때다. 제왕적 권한을 누리던 박 대표는 최고위원회의를 주재하며 자신이 통과시킨 안건을 다음 날 다시 가져와 수정하자고 하는 걸 여러 번 봤다. 그런 모습이 반복되자 ‘누군가가 박 대표 뒤에서 조언을 넘어 컨트롤하거나 코치하는 사람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소문으로만 떠돌던 비선 실세 최순실의 국정농단 의혹사건이 드러나면서 십수 년 전부터 가졌던 의문이 풀렸다. “봉건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믿을 수 없는”(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게 확인됐고, 국민은 그야말로 정신이 붕괴하는 충격을 받았지만, 박 대통령은 일본 총리들이나 하는 것 같은 성의 없는 사과를 했다. 비선조직에 휘둘린 허수아비가 된 청와대 참모진은 자괴감에 스스로 사표를 던졌어야 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눈치를 보다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서야 사표를 내는 등 끝까지 스타일을 구겼다.

분위기 파악이 안 되기로는 검찰도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의 발목을 비틀어서 450억∼460억 원을 내는 것으로 해서 (미르재단이) 굴러가는 것 같다”(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는 증언이 나왔고, 대통령 스스로 “기업인들의 문화·체육에 대한 투자 확대를 부탁드린 바가 있다”고 말했다. 두 발언을 종합하면 대통령의 요구로 대기업에서 순식간에 774억 원을 거둬 미르·K스포츠재단이 만들어졌다는 게 거의 확인된 것이다. 최순실에게 대통령 연설문은 물론 국무회의 자료, 외교·군사·안보 관련 자료 등을 넘겨준 것도 박 대통령 자신이었음을 시인했다. 두 재단과 최순실 의혹사건의 몸통은 박 대통령임이 드러났음에도 검찰은 “대통령은 수사대상이 아니다”고 선을 긋고 있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 이영렬 특별수사본부장(서울중앙지검장)은 대통령은 형사상 소추 대상이 아니어서 수사 대상도 아니라는 주장을 펴지만, 봉건시대도 아니고 대통령은 법 위에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재임 기간 기소가 면제된다는 것은 퇴임 후 기소가 된다는 뜻이며, 따라서 지금 철저히 수사해 놓아야 나중에 기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검찰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수사를 미적거리다 오히려 박 대통령에게 최대 참사가 된 사건을 발생하게 한 건 아이러니하다. JTBC가 최순실 사무실에서 얻은 태블릿PC에 담긴 청와대 주요 문건들은 검찰이 조금만 일찍 압수수색에 나섰다면 세상에 공개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검찰은 대통령이 비서진 사표 제출을 지시한 다음에야 청와대 압수수색을 시도하는 등 기회주의적 모습을 또 한 번 드러냈다. 여당은 특별검사 도입에 합의했으면서도 박 대통령이 몸통인 사건을 수사할 특검을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토록 해야 한다는 상식 이하의 주장을 펴면서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다. 박 대통령은 1분35초짜리 무성의한 사과가 표현상의 미숙일 뿐 진정성은 있었다면 여당과 검찰을 그만 고생시키고 “나부터 철저히 수사하라”고 해야 한다. sdg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