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낀 대한제국의 운명을 풍자한 삽화. 1905년 미국 시사 잡지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실렸다. 자료 사진

⑥ 역사에서 배운다

최근 한반도의 주·객관적 정세를 구한말(舊韓末)과 자주 비교한다. 북한의 5차 핵실험 성공으로 핵무기 실전배치가 가시화했으나, 우리의 국방·외교 능력이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주체적으로 대응하기 힘겨운 상황에 닥친 게 아니냐는 위기의식이다. 조선 시대 내내 대책 없이 의지한 중국의 쇠락 이후 아무 자주권의 대비 없이 외세에 휘둘리다 결국 일제강점을 당한 구한말 상황과 비견하는 것이다.

학계에선 시대를 더 거슬러 임진왜란 때 이미 대륙-해양세력의 역사적 첫 충돌이 한반도에서 벌어졌고, 이는 청일전쟁·러일전쟁으로 이어질 미래의 ‘경고등’이었으나 대비하지 못해 참담한 역사의 반복을 불렀다고 본다. 2000년대로 보자면 대륙세력 중국의 부상 및 패권 행보에 대해 해양세력 일본과 미국이 밀착해 대응하는 가운데 두 세력의 요충지인 한반도는 분단을 해소하지 못했고, 와중에 우리는 전략적 입장을 분명히 설정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갑론을박하는 형국이다.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은 국제질서와 연동해 통시적·거시적으로 분석, 교육되기보다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는 식의 민족사관을 이제껏 벗지 못했다.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임진왜란은 2000년 가까이 중원의 제국을 중심으로 구축된 동아시아 질서가 처음 바다 건너 남쪽으로부터 도전받은 ‘사건’으로, 약 300년 후에 유사한 성격으로 발생한 청일전쟁(1894∼1895)의 전조였다”고 말한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도 “임진왜란 이전에 한반도는 유라시아 동부라는 거대한 무대의 주변부였으나, 임진왜란으로 대륙과 해양세력 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대두했고, 구한말에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지정학적 동력이 작동했다”고 말한다.

계 교수는 “임진왜란의 내적 요인을 ‘오랜 평화’로 인한 조선의 ‘무사안일’이라고 피상적으로 보지만, ‘오랜 평화’ 자체가 명(明)이 주도한 국제질서에 조선이 스스로 복속해 왕조의 안녕을 보장받는 ‘군신(君臣)’ 관계에 안주한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는 “조선은 일본군에게는 국토를, 명군에게는 자주권을 유린당했다”고 말한다.

중국에 의지해 ‘왕조의 안녕’만 보장받으려는 조선이 군사력을 키웠을 리 없다. 조선의 병력 규모는 대략 16만8400명 수준이었으나 일본은 34만6600명이 출병한다.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밀리며 전 국토를 유린당했고,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몽진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였다.

임진왜란에서 교훈을 얻지 못해 다시 한반도를 대륙-해양세력 간의 패권 전쟁터로 내놓은 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다. 청(淸)이 아편전쟁(1842)에서 프랑스와 영국 등 서구열강에 패하고, 청일전쟁에서도 일본에 패한 뒤 구한말 조선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세계관의 대혼란을 겪는다. 뒤늦게 중국과 결별하고 일본, 미국, 러시아 등 새로운 우방을 찾지만 내부 분열만 가속했을 뿐 이미 늦은 시도였다. 구한말의 연표를 보면 자주적 국방력이 없이 고비마다 외세에 의존하려다 망국의 길로 들어선 과정을 볼 수 있다. 임오군란(1882)을 맞아 청을, 갑신정변(1884)에서 일본을, 동학농민운동(1894)에서 다시 청을 끌어들였다가 결국 청일전쟁을 자초했다.

또 아관파천(1896)에서 러시아에 의지하다 러일전쟁(1904)을 불렀고, 일본이 승리하며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한반도는 저들의 수중에 떨어지고 만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대한제국은 뒤늦게 국방력 강화를 위해 근대적 군사제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국민개병제(징병제)를 고려했지만 실시하지 못했다”며 “근본적 이유는 재정 부족 외에 징병제 실시로 신분질서의 혼란과 민권의 보장을 두려워한 고종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반대와 기피에 있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나라 예산의 40%를 쏟아부은 군사력 증강정책은 황권을 보위하고 내부치안을 담당하는 수준에 그쳤다. 1901년 1만7000여 명이던 한국군은 1905년 7000여 명 수준으로 격감하고, 1907년 일제에 의해 해산된다. 고종과 집권세력은 아관파천의 경험을 살려 외국공사관으로 피신하거나 중립화 노선을 추진한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자위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중립 외교나 선언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한국은 중국의 ‘속국’에서 일본의 ‘식민지’로 바뀌게 됐다. 구한말 전쟁사를 연구한 심헌용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전략적, 지정학적 가치를 부각하고 자신의 입장을 주장할 수 있도록 국방력을 확충하는 길밖에 없다”며 “이것이 110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상황에서 얻을 교훈”이라고 말한다.

엄주엽 선임기자 ejyeob@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