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임신부 직장인의 유산을 막기 위한 취지로 지난 2014년 도입된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기업현장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은 유한킴벌리 임신부 직원들이 가족친화경영협의회가 여성휴게실 ‘느티나무 그늘방’에 마련한 수유실에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 문화일보자료사진

13 ‘빛 좋은 개살구’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회사 눈치를 보다가 임신 9주 지나서 임신기 근로단축 신청을 했는데, 첫날 오전 10시에 출근했더니 분위기가 정말 싸늘했다. 근로단축 기간이었음에도 업무 부담이 줄지 않아 일주일에 두세 번밖에 일찍 퇴근하지 못했다. 사무실에 앉아있다 보면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난다.”(중견기업에 근무하는 A 대리)

“임신 초기 몸이 안 좋아 병가를 며칠 썼다. 당시 부서장이 ‘우리 애 엄마는 임신했을 때 유별나지 않던데 B 대리는 허약체질인가 보다’며 못마땅해한 터라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신청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대학 교직원 B 씨)

지난 2014년 도입된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는 현재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본격 시행한 지 2년이 지났으면 정착될 만도 한데 현실은 딴판이다. 이 제도는 유산·사산 위험이 큰 임신 초기와 말기에 있는 직장 여성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기 위해 시행됐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직장 여성의 자연유산 비율은 5.1%다. 비(非)직장 가입자(3.9%)보다 1.2%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20∼40대 모든 연령층에서 이 같은 경향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임금이 줄어들지 않으면서 시간을 단축해 근무할 수 있도록 한 게 이 제도의 취지다. 예를 들어 하루 8시간을 근무하고 월 200만 원의 임금을 받는 임신 12주 이내 또는 36주 이후 여성 근로자가 한 달 동안 하루 2시간의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할 경우, 근로기준법 제74조에 따라 임금 감소 없이 단축근무를 할 수 있다.

◇갈 길 먼 임신기 단축 근로제 = 고용노동부가 올해 4∼7월 사이 임신·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활용 현황을 조사한 결과, 조사 대상 1891개 기업 중 55.6%인 1052개 기업이 ‘활용 근로자가 없다’고 답했다. 절반이 넘는 기업에서 임신·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가 ‘무용지물’로 전락한 것이다. 말로만 모성보호인 셈이다.

반면, 국내 외국계 기업의 경우 사정은 좀 낫다. 외국계 기업에 근무하는 C 과장의 사례다. “우리 회사에서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첫 사례로, 한 달 동안 2시간 일찍 퇴근했어요. 몸이 땅으로 꺼질 것 같아 신청했는데 평일에 산부인과에 다닐 여유가 생겼고, 출·퇴근 ‘지옥철’을 피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임신 3개월이 지나자 컨디션을 되찾아 원래대로 근무할 수 있었죠.” 무엇보다 회사 내 분위기와 인식이 중요하다는 평가다.

특히, 기업 규모가 작을수록 사용이 저조했다. 민간기업의 경우 근로자 1만 명 이상 기업 중 활용 실적이 없다고 답한 곳이 16.7%에 그쳤지만 1000명 미만 기업 중 무려 65.3%가 활용실적이 없다고 답했다. 1000∼5000명 미만 기업은 50.7%, 5000명∼1만 명 기업은 28.9%가 제도 활용 실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공공부문도 활용 실적이 저조하긴 마찬가지였다. 중앙정부의 54.5%, 광역지방자치단체의 58.8%, 기초지자체의 55.2%에서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활용 실적이 전혀 없었다. 지방공기업이나 교육기관 등 공공기관도 44.3%가 제도를 활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좋은 제도지만, 강제 수단은 없어 = 근로시간을 단축해도 임금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정부가 사업주에게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근로자 1인당 40만 원의 지원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중소·중견기업은 이에 더해 간접노무비 20만 원을 추가로 지원받을 수 있다. 여성 근로자가 임신 12주 이후 또는 36주 이전일 경우에도 하루 2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신청하면 월 190만 원(하루 8시간 근무, 월 200만 원 임금 근로자 기준)의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다. 줄어든 근로시간에 비례한 임금은 월 150만 원이지만, 정부가 40만 원의 전환장려금을 지급해 임금 감소 폭이 주는 것이다.

문제는 기업 현장에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제도 활용을 강제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2014년 제도 시행 이후 현재까지 고용부에 접수된 임신기 근로시간 단축 의무 위반 사례는 5건에 불과하다. 이 중 2건은 기업의 시정 조치로 마무리됐고 3건은 신고자가 의견 진술을 하지 않아 사건이 종결됐다. 위반 사업장에는 과태료 500만 원을 부과할 수 있지만, 과태료 부과 사례는 아직 없다. 고용부 관계자는 “근로자가 회사를 그만둘 결심을 하지 않는 이상 사업주를 신고하기가 쉽지 않다”며 “근본적으로는 직장 문화 개선이 뒤따라야 제도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내년까지 미활용 기업 ‘제로(0)’가 목표라지만… = 고용부는 임신기 근로단축제도 활용이 전혀 없는 기업 1000개를 선정해 집중 지도할 계획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28일 “내년 말까지 법정 ‘모성보호제도’ 미활용 기업을 제로(0)로 만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며 “가임기(15∼49세) 여성이 10명 이상이면서 임신 5개월이 지난 근로자가 있는 사업장에 매월 팩스와 이메일을 통해 제도 안내문을 보내고, 기업을 상대로 대규모 설명회도 개최하는 등 집중 홍보와 지도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집중 홍보와 지도에도 개선이 없는 곳은 법 위반 의심 사업장으로 지정해 중점 지도·감독하기로 했다. 물론 임신기 근로단축제도를 선제적으로 시행하는 모범 기업도 있다. 3778명의 여성 근로자를 고용한 아모레퍼시픽은 2015년 183명, 올해 9월까지 114명이 평균 32일 임신기 근로단축 제도를 활용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예비맘 배려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는 매달 임신기 근로자가 포함된 팀에 근로시간 단축제도 등 모성보호제도를 안내하는 프로그램이다. 제도 시행 이후 근로자 근무만족도가 2014년 60.8%에서 2015년 65.3%로 상승했다.

이마트는 임신기 근로자가 시기에 상관없이 근로시간 단축제도를 이용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간 수준이다. 모든 임신기간에 임금삭감 없이 제도를 이용할 수 있고, 하루 2시간 단축근무 시간대를 근로자가 자율로 정할 수 있다. 올해 4월부터 시행한 이 제도는 3개월 동안 이용자가 127명에 달했다.

김영주 기자 everywhere@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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