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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종 논설위원

‘속세의 교황’이라는 유엔 사무총장에 한국 출신이 오른 것은 ‘모든 별이 한 줄로 설 때’만큼 하늘과 땅이 도운 사건이다. 행운의 주인공인 반기문 사무총장이 이번 추석 연휴 동안 뉴욕을 방문한 정세균 국회의장과 3당 원내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내년 1월 중순 귀국 사실을 알렸다. 10년 만의 금의환향(錦衣還鄕)이지만, 74세에 휴식이 아닌 새로운 출발을 선포한 셈이다. “귀국 보고대회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제안에 흔쾌히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을 보면 지난 5월 잠시 귀국해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한국 시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결심하겠다”고 한 것보다 한 발 더 나간 듯하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국가적 명예를 걸고 대선판에 뛰어드는 반 총장에게 또 한 번 별들이 한 줄로 서는 행운이 찾아올지는 미지수다. 대통령이 된다면 모든 것이 아름다운 얘깃거리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무총장의 영예를 대권욕을 위해 버렸다는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평생 외교관으로 권력에 의해 주어진 자리에 최적화된 반 총장이 권력을 만들어 가는 대권에 어울릴지 찬반(贊反)이 갈린다.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리는 본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강대국의 합의에 따라 정해지는 자리인 만큼 스스로 쟁취해 낸 것은 아니다. 정치 9단인 김종필(JP) 전 총리가 정 원내대표를 통해 반 총장에게 “결심한 대로 이를 악물고 하라”고 보낸 메시지는 이런 반 총장의 상황을 직시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행정의 달인’으로 불리던 고건 당시 총리는 이명박·박근혜 후보를 한참 따돌리고 지지율 40%대의 압도적인 1위를 달렸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고건 총리 기용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라는 한마디에 지지율이 급전직하하더니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미친 영향도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내가 왜 대통령을 하려고 하는가’하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JP는 반 총장이 사무총장이라는 명성과 인지도만 믿고 오만에 빠지는 것을 경고한 것이다.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검증(檢證)과 야당의 공세를 헤쳐나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 기간에 공개된 여론조사를 보면 일단 반 총장이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6일부터 8일까지 전국 성인 1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반 총장의 지지율은 27%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18%), 국민의당 안철수 전 공동대표(8%)를 따돌렸다. 반 총장의 현재 지지율이 1위이긴 하지만 역대 고건, 안철수 등 장외 인사들이 기록했던 30∼40%대의 높은 지지율에 비하면 약하다. 아무런 공격이 없는 지금 상황치고는 불안하다. 특히, 반 총장이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절대적 지지 속에 새누리당에 입성한다면 지지율 동조현상으로 자칫 수렁에 빠질 위험성도 있다. 내년 귀국 후 어떤 모양으로 정치권에 입문하느냐가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의 관계도 득과 실이 뚜렷하다. 고 전 총리처럼 현직 대통령이 끌어내리지 않고 적극 지원해주는 상황에 콘크리트 지지층을 넘겨받을 순 있지만 확장성은 의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서 박 대통령으로 보수 정권이 넘어간 것은 정권 연장이 아니라 교체로 받아들였기에 가능했다. 내년 대선까지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처럼 50%를 넘나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박 대통령의 지지가 오히려 반 총장을 고립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또 JP의 지지를 등에 업고 지역정치의 혜택을 입으려 한다면 정치 퇴행(退行)과 다름없다.

북한이 5차 핵실험을 성공시키고, 국제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협박하는 국면이 지속될 경우 ‘외교 달인’인 반 총장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국민이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외교는 반 총장이 벌여왔던 외교 문법을 넘어 창조적인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국의 전술핵 재배치와 핵무장 등 높아져 가는 국내 여론에 전통 외교 관료인 반 총장이 어떤 해법을 제시할지 주목된다. 반 총장의 귀국길에 ‘붉은 카펫’이 깔려 있지는 않을 것이다. 트랩에서 내리자마자 원하지 않는 진흙탕 싸움에 바로 빠져들어야 할지 모른다. 대선은 ‘기름 장어’(반 총장 별명)가 가기엔 너무 험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