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크게보기 이만수 전 SK 감독이 지난 7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의 공원에서 “고민이 있을 때마다 공원에서 산책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한다”고 말하며 활짝 웃고 있다.곽성호 기자 tray92@

이만수 前 SK 감독

‘헐크’ 이만수(58) 전 SK 감독의 야구 인생은 롤러코스터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전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 원년(1982년) 멤버이며 역대 최강의 공격형 포수로 꼽힌다. 1997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뒤 지도자 수업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2005년엔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코치로 월드시리즈 우승이란 기쁨을 누렸다. 2006년 국내로 유턴, SK의 수석코치와 감독을 지냈다. 화려한 경력에 흠집이 난 건 2014년. 그해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에 실패한 뒤 프로야구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야구 전도사’의 길을 걷고 있다. 야구 불모지인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또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하는 선수들과 유소년·여성 선수들을 위해 재능기부를 펼치고 있다.

이 전 감독을 지난 7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전 감독은 “행복하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 전 감독은 “야구에 몸담은 40여 년 동안 스트레스 탓에 위장병을 달고 살았고 아프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며 “하지만 감독을 그만둔 뒤론 아픈 곳이 없고, ‘행복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말했다.

엄청난 파워를 지녀 ‘헐크’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이만수는 딱 40세 되던 해에 유니폼을 벗었다. 지금은 40대가 여럿 있지만, 당시로선 ‘형님 중의 형님’이었다. 이 전 감독은 “1년 더 선수생활을 하길 원했지만, 배트를 내려놓아야 했다”며 “은퇴 후에 대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기에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이 전 감독은 미국으로 떠났다. 이 전 감독은 “평생 할 것만 같았던 야구를 그만두고 대책 없이 미국으로 갔다”며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갔기에 미국 생활이 처음엔 쉽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미국에서 미래를 설계했다. 나중에 지도자가 되더라도 언젠가는 끝이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지도자를 은퇴한 뒤에 무엇을 할지 대비해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 전 감독에게 미국 생활은 보약이 됐다. 이 전 감독은 “은퇴하고 미국에 갔는데 한국에서 유명한 이만수를 아무도 모르더라”며 “한국에서 내가 정말 인기에 취해 있었구나, 남들이 연호하는 이만수는 진짜 이만수가 아니었다는 겸손을 배웠다”고 밝혔다.

미국에 머물며 ‘나중에 감독을 그만두면 할 일’이라는 리스트를 작성했다. 야구해설, 작가, 야구 아카데미 개원, 야구팀 창단, 재단 설립, 그리고 재능기부 등 무려 22가지였다. 이 전 감독은 SK를 떠나면서 묵혀두었던 리스트를 들췄다. 그런데 막상 실천하자니 막막했다. 운동만 해왔기에 무엇을 어떻게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실업자가 된 이 전 감독은 아내와 함께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찾았던 경기 광주시의 한 수도원을 찾았다. 동유럽으로 여행 떠나자는 말을 하려는데 아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전 감독은 “그때 아내가 ‘평소 재능기부를 약속해놓고, 시간이 남는 지금 왜 실천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운동하는 사람은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조언했다”며 “아내의 꾸지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고 설명했다.

이 전 감독은 SK 사령탑이던 2013년 말 라오스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라오스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특별한 관심이 없었다. 이 전 감독은 “SK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라오스에 가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했었다”며 “SK 선수들이 입고 버리는 유니폼들을 모아 라오스에 보내주는 정도였다”고 말했다. 아내로부터 쓴소리를 들은 뒤 1주일 만에, 그러니까 2014년 11월 12일 라오스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미지 크게보기 ‘라오스 브라더스’의 이만수 구단주와 그의 애제자들.

라오스는 그러나 상상 이상으로 열악했다. 야구를 하겠다며 찾아온 아이들을 살펴보니 맨발이었다. 아이들은 야구의 기본적인 규칙조차 몰랐다. 라오스 정부에선 사람을 보내 이 전 감독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았다. 라오스 야구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사업가, 지인들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 전 감독은 “감독직을 그만두고 가장 처음으로 배운 단어가 ‘거절’이었다”며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는 어떤 부탁이든 다 들어주던 사람들이 백수가 돼 나타나니 모르는 척하더라. 정말 충격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감독은 특유의 호탕함으로 이 모든 난관을 돌파했다. 라오스 정부 관계자를 찾아가 지원을 요청했고, 계속해서 후원자를 모았다. 무덤덤하고 무표정한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공을 쳐 낼 때마다 힘껏 안아주었다. 마음과 몸으로 다가서자 굳게 잠겼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오스 최초의 야구단 ‘라오스 브라더스’의 구단주가 됐다. 라오스 브라더스엔 15∼24세 45명 정도가 소속돼 있다. 이 전 감독은 1년에 적어도 4차례 라오스로 넘어가 야구를 지도하고 있고 글러브, 배트 등 야구 장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 전 감독은 “라오스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 꿈을 얻었다”며 “더 감동적인 건 야구선수가 꿈이라는 아이들보다 조국을 위해 의사, 교사, 정치가가 되겠다는 아이들이 더 많다는 점이다. 스포츠가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엔 후배인 권영진 전 대구고 감독이 전임 코치로 라오스에 파견됐다.

이 전 감독은 라오스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재능기부를 실천하고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료 강습을 진행한다. 이 전 감독은 “대한야구협회를 통해 무료 강습 공문을 띄웠는데 한 두달간은 연락도 오지 않더라”며 “프로야구 감독까지 한 내가 돈도 안 받고 지도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정신없이 바쁘다. 대학, 중·고교 야구부는 물론 사회인·여자 야구까지 연락이 오기에 1주일에 3∼4일은 지방에 머문다. 이 전 감독은 “새 차를 산 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됐는데 주행거리가 벌써 6만3000㎞나 된다”며 “숙박비, 교통비 등 강습 비용은 모두 내 개인 돈으로 충당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비’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난 5월 자신의 별명으로 이름 붙인 ‘헐크 파운데이션’이란 재단을 설립했다. 야구와 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전달한다는 게 헐크 파운데이션의 비전. 이 전 감독이 평소 알고 지내던 교수들이 재단 설립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헐크 파운데이션은 오는 27일부터 29일까지 경기 고양시 일산 NH 인재원 야구장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야구 교실을 진행한다. 이 전 감독과 한화의 내야수였던 한상훈(36)이 재능을 기부한다.

이 전 감독은 2006년 SK로부터 수석코치 제의를 받았지만 망설였다. 이 전 감독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떤 꼴을 당할지 뻔히 눈에 보였기 때문에 처음엔 거절했다”며 “하지만 그때도 아내가 ‘미국에서 배운 선진 야구를 한국에 전할 때’라며 끈질기게 설득해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아내는 그에게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다. 이 감독은 한양대에 입학한 뒤 훈련하느라 당시 여자친구이자 지금의 아내와 새벽 5시에 데이트를 즐겼다. 이 전 감독은 “당시 송파구 문정동에 살았고 매일 새벽마다 뛰어서 아내가 살고 있던 동대문구 장안동에 갔다”며 “아내 집에 도착하면 새벽 5시쯤 됐고 잠든 아내를 깨워 데이트한 뒤 운동장으로 돌아와 훈련하는 게 일과였다”고 말했다.

2006년 11월부터 당시 김성근 감독 밑에서 수석코치를 지냈고 2011년 8월 김 감독이 전격 경질되면서 감독 대행을 맡았다. 그리고 2011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뒤 감독으로 승격됐다. 이때 김 감독과 이 전 감독 간의 불화설이 나돌았다. 이 전 감독은 “그때의 이야기는 해본 적도 없고, 할 계획도 없다”며 “너무나 예민했던 문제이고 당시 온 가족이 솔직히 죽다 살아났다”고 말했다.

그를 아끼는 많은 팬은 헐크의 컴백을 믿고 있다. 하지만 이 전 감독은 조심스럽다. 이 전 감독은 “프로야구 감독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며 “선택은 구단의 최종 결정권자가 하는 것이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그의 목표는 무엇일까. 이 전 감독은 가장 하고 싶은 일로 라오스 야구장 건설을 꼽았다. 이 전 감독은 “우리나라에 처음 야구가 들어왔을 때 그 누가 한국이 세계 수준의 야구 강국이 될 것이라 생각했겠느냐”며 “라오스에 처음 야구를 보급한 사람은 시간이 흐른 후에 잊히겠지만, 라오스에서 야구는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손우성 기자 applepie@munhwa.com